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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영화 같은 일이 현실로… 섬뜩한 기술
잊고싶은 것 지워버리고 행복한 경험만 머릿속에… 기억 조작 가능해진다빛에 반응하는 단백질 유전자신경세포에 삽입해 기억 관장초정밀 제어기술 연구 등 활발영화 '토탈리콜' 현실화 눈앞에
김경미기자 kmkim@sed.co.kr
영화 '토탈 리콜'의 주인공이 기계장치를 이용해 가짜 기억을 주입받고 있다. 과학자들은 빛으로 특정 세포에 자극을 줄 경우 없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기억을 제거하는 일 등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사진제공=컬럼비아픽처스
평범한 삶을 보내던 더글라스 퀘이드는 언젠가부터 화성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만 꾸는 것으로는 모자라 직접 화성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중 TV를 통해 '완벽한 휴가의 기억을 팝니다'라는 한 회사의 광고를 본다. 유명 관광지에서 본 완벽한 풍광과 경험, 안락한 시간 등 휴가를 통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기억들을 뇌에 새겨 직접 경험한 것과 동일한 기억을 준다는 것이다. 이 가짜 기억은 종종 희미해지기도 하는 진짜 기억보다 오히려 더 생생하고 뚜렷하다. 우리의 뇌는 진짜 기억과 가짜 기억을 결코 구분할 수 없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주연한 1990년 작을 리메이크해 올 8월에 개봉하는 영화 '토탈 리콜'은 완벽하게 기억을 제어할 수 있는 세상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원하는 기억을 선택해 실제처럼 내 머릿속에 집어 넣는 것은 물론 잊고 싶은 기억 위에 새 기억을 덧씌워 원래 기억을 지울 수도 있다.
슬픈 기억은 잊고 행복한 기억만을 남긴다는 구상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아왔지만 한편으로는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허무맹랑한 소리쯤으로 치부돼왔다.
하지만 '기억 제어'에 관한 연구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인 뇌 과학의 발전과 함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다.
이미 뇌 신경전달 신호를 받아들이는 부분을 활동하지 못하게 하면 새로운 기억이 저장되지 않는다거나 특정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키면 공포 등 부정적인 감정이 빠르게 사라진다거나 하는 정서나 기억에 관한 메커니즘(원리)은 여러 연구를 통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문제는 이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기존 같이 뇌에 전기봉을 꽂는 식으로는 불특정 다수의 신경세포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주변 다른 세포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특정 기억을 관장하는 세포에만 자극을 줄 수 있는 초정밀 제어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빛과 유전자를 이용했다. 이른바 광유전학(Optogenetics)이다.
지난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 칼 다이서로스 연구팀은 녹조류에 분포된 채널로돕신(channelrhodospins)이란 단백질 유전자를 신경세포에 유전공학적으로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단백질은 빛을 받으면 채널이 열리고 빛이 없으면 채널이 닫힌다. 채널로돕신 단백질을 신경세포에 주입할 경우 빛을 받을 때마다 세포 내의 채널이 열려 칼륨이온 등 양이온이 세포 안으로 들어오면서 세포가 흥분한다. 즉 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외부의 자극을 받아 감정ㆍ감각을 느끼는 것과 동일한 작용이 나타나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 이 기술을 사용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특정 장소나 특정 향기에 대해 어떤 기억을 심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기도 했다.
2009년 옥스퍼드대의 게로 미센보크(Gero Miesenbock)박사 팀은 초파리의 뇌에서 학습 능력을 담당하는 세포에 자극을 줘 특정 향기를 맡을 경우 나쁜 기억을 연상하게 함으로써 그 향기를 피하게 만들었다. 실험에 쓰인 향기는 초파리가 한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향이다. 보통 초파리 같은 생명체의 행동이 축적된 경험을 통해 변화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향에 회피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 향기를 맡은 후에도 계속 전진한다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는 가짜 경험이 전기 자극으로 인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특정 향기를 피하는 행동이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같은 방식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일도 가능하다. 부정적이거나 혐오적인 감정상태를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활성화되는 전두엽 피질 안의 특정 세포를 자극하면 슬프거나 괴로운 감정이 빠르게 소멸될 수 있다는 원리다. 전문가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 외상 후 트라우마 등의 뇌질환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창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기능커넥토믹스WIC센터 부센터장은 "생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기억을 없애는 것은 가능했지만 우울증 등 전반적인 뇌질환에 모두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이라며 "특히 유전자 전달의 매개체가 되는 바이러스의 사용이 인간에게는 금지돼 있어 인간 대상의 상용화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한편 국내 광유전학 연구기관인 KIST 기능커넥토믹스WIC센터에서는 광유전학을 이용해 살아 있는 생명체의 뇌 속 지도를 그리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부센터장은 "예를 들어 치매 환자들의 뇌 속 회로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밝혀내 정상인과 비교할 수 있다면 회로를 고쳐 치매를 치료할 수 있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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