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가까이 보험설계사로 일해온 전미숙(가명)씨에게 올 겨울은 어느 때보다 혹독한 계절이다. 지난달 전씨가 받은 수당(월급)은 180만여원. 지난해 이맘때에 비해 수입이 20%가량 줄었다. 최근에는 주유비라도 아끼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걷는 일도 부지기수다. 전씨는 "금융위기 때도 이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며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니 앞날이 더 막막하다"고 말했다.
7년 동안 카드모집인으로 활동해온 강민구(가명)씨는 최근 하루에 한 번씩은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본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월 평균수입이 300만원은 됐지만 올 들어서는 200만원 넘게 번 달이 3개월에 불과했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다음달부터는 '카파라치(카드+파파라치)'가 시행된다. 강씨는 잠재적 범죄자가 될 바에야 업종을 바꿔 떳떳하게 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정부의 금융산업 규제가 잇따르면서 이른바 '규제의 역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규제의 칼날을 갈면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과 산업의 발전적 모색은 생략한 채 눈앞에 보이는 왜곡에 대해서만 집중한 탓이다. 특히 규제의 역설이 고용위축을 이끌고 사회적 약자의 생계난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관료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크다.
◇현실을 모르는 탁상행정=최근 보험설계사ㆍ카드모집인 등 금융중개인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정부가 내놓은 일련의 정책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필요하니 해야 한다'는 정부의 일방통행이 시장을 위태롭게 하고 산업의 가장 하단에 위치한 자신들의 일방적 피해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세법 개정안, 그 중에서도 즉시연금 비과세 혜택종료 제도다. 국회에서 브레이크가 걸리기는 했지만 즉시연금이 '세금회피' 수단으로 쓰인다며 정부가 세법 개정안에서 비과세 혜택을 철회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다. 특히 금융중개인 단체들은 이는 현실을 모르는 탁상행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대형 생보사 3사의 즉시연금 계약 2만2,708건 중 3억원을 초과하는 고액납입은 16.74%에 불과하다. 반면 절반이 넘는 55.6%가 1억원 이하를 납부했고 1억~3억원 비중은 27.66%였다.
한 대형생보사 관계자는 "자산가들의 세금회피를 문제 삼는다면 납입금 규모에 따라 차등화해 세율을 적용하는 게 맞지만 정부는 일괄적용을 고수했다"며 "1억원을 즉시연금으로 가입한다고 하면 월 수령금액은 평균 30만원에 불과한데 과연 이들을 자산가라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고용위축ㆍ생계난 유발=현재 나타나고 있는 규제의 역설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고용위축과 생계난을 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정부의 규제 시리즈가 잇따라 나오면서 고용위축을 예단하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규제의 주된 표적이 됐던 카드사는 '인력 줄이기'에 이미 돌입했다.
규제의 역설은 산업 구석구석을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가장 하단에 위치한 금융중개인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2012회계연도 상반기 자료를 보면 보험설계사의 월평균 소득은 287만원으로 지난해보다 13만원(4.3%) 줄었다. 반면 영업환경은 오히려 악화됐다. 지난 9월 말 현재 설계사 수는 39만1,000명으로 3월 말(37만7,000명)에 비해 1만4,000명(3.8%) 늘었다.
보험설계사 단체들은 생계는 더 팍팍해졌는데 정부가 규제정책을 수립할 때 이 같은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고 주장한다. 세법 개정안대로 즉시연금과 중도인출 비과세를 폐지하면 보험설계사들의 생계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김소섭 한국보험대리점협회 회장은 "세법 개정안은 중산서민층의 노후보장을 위태롭게 하고 보험모집 종사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정부는 당장 세제 개편안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규제의 파도가 보험업계보다 먼저 휩쓸고 간 카드업계는 산업 자체가 이미 크게 위축됐다. 카드대란 이전 10만명을 넘어섰던 카드모집인은 현재 4만명에 불과하다.
◇규제의 틀을 바꿔야=정부의 규제 일변도가 역설로 작용한 사례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목격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과 부담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몫으로 돌아왔다.
3월 인천에서 14년간 보험설계사로 일해온 조모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조씨는 딸에게 남긴 유서에서 "변액연금 등 문제가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로 끊임없이 터졌다. 감당하기 어렵다"고 썼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금융중개인들의 반발에는 사회적 약자가 느끼고 있는 위기감이 투영돼 있다.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금융당국의 규제가 시장의 질서와 현실을 배려하지 못하면 엉뚱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며 "결국 그 피해는 사회적 약자와 소비자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커 신중한 정책 집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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