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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개혁의 正道

왜 5대 재벌은 개혁정책에 상응하는 변신이 없었는가.한마디로 대마불사를 믿는 도덕적 해이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이런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데 기여했다. 6대 이하의 재벌에 대해서는 워크아웃을 하면서 5대 재벌에는 빅딜을 추진한 것, 현대에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게 하고 대북한 교류의 향도가 되게 한 것, 대우그룹의 부실을 미봉책으로 감추어온 것 등이 5대 재벌과 국민에게 도덕적 해이를 심어준 것이다. 현정부가 출범 직전부터 추진해온 ①경영투명성 제고 ②경영진 책임 강화 ③상호빚보증 해소 ④재무구조 개선 ⑤업종전문화의 재벌개혁 5대 원칙은 역대 정부는 엄두도 낼 수 없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중 처음 넷은 시장경제의 규칙을 제대로 세우는 것으로서 내년부터 효과가 나타나게 돼 있다. 문제는 마지막의 업종전문화 원칙이다. 과거에도 시도했다가 실패로 끝난 업종전문화를 빅딜로 밀어붙이려 한 것이 재벌개혁의 큰 그림을 우그러뜨렸다. 「선단식 경영을 지양하고 핵심기업을 정해 전문화하라.」 명분은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가시적 성과를 조기에 내려는 강박감으로 빅딜을 강요한 데에서 온갖 부작용이 불거졌다. 지당한 명분과 가부장적인 지시로 경제를 요리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보여준 사례이다. 대통령이 추가로 천명한 부당내부거래와 변칙상속의 차단은 시장경제의 기본이다. 그러나 순환출자 억제와 산업-금융자본의 분리원칙은 지당한 명분임에도 불구하고 실효성이 의문시되고 시간도 없다. 특히 제2금융권이 재벌의 사금고가 되는 것을 막겠다는 분리원칙은 제대로 시행하기로 들면 빅딜처럼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양산하면서 꼬이기 쉽다. 현정부는 현대그룹에 국민투신을 인수하도록 했다. 나아가 재벌들이 계열투신사를 통해 시중자금을 싹쓸이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그러고는 이제 와서 재벌의 제2금융권 지배를 막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는다. 규제와 회피·편법의 숨바꼭질 속에 영일(寧日)이 없을 것임은 뻔하다. 선진국 대기업들이 산업자본이나 금융자본 중 어느 하나로만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계열사 부당지원과 같은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범죄행위를 철저히 적발해 엄단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천편일률적인 선단식 경영과 총수 전제체제를 고쳐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유연한 자원배분을 통해 고수익·고위험의 첨단프로젝트나 대규모 투자를 수행하는 데 선단식 총수경영이 유리하다는 산업조직론자들의 지적도 유감스럽지만 맞다. 결국 공정거래와 투명·책임경영이 이루어지도록 시장제도를 만들고 이를 엄정하게 집행하는 것만이 정부의 임무여야 한다. 빅딜을 뺀 정부의 재벌개혁 4대원칙과 부당내부거래·변칙상속의 차단이 바로 이것과 부합된다. 이런 틀에서 기업조직은 개별기업과 시장이 알아서 결정하게 놓아두는 것이 순리이다.(예컨대 삼성그룹이 세계 1위의 상품을 12개나 가지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런 그룹이 부당내부거래가 없고 투명한 경영을 하며 총수가 자기 지분권을 행사해 책임경영을 한다면 계열로 묶여 있든 개별기업이 느슨하게 연합하든 정부가 상관할 일이 뭔가.) 금융위기와 환란은 정부·정치와 재벌의 공동책임이다. 정치는 여권에서 거론된 것처럼 오너의 재벌지배 못지않게 오너의 정당지배가 자심(滋甚)한 3류 정치이다. 공기업 구조개혁은 재벌 구조개혁보다 훨씬 부진하다. 재벌과 50보 100보인 정부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먼저 자기를 개혁하면서 재벌개혁을 견인해야 한다. 이것이 「진검승부」다. 달라진 시대에 재벌이 거듭 나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대통령은 「이제는 시장이 재벌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라고 말했다. 시민단체와 진보적인 학자들은 시장경제에 맡기자는 것은 재벌개혁을 하지 말자는 것이라고 종종 목청을 높인다. 이처럼 「시장」이라는 말이 오용되거나 매도되는 데에는 재계의 책임이 크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재벌체제하에서 정부규제만 없애면 시장경제인 것처럼 외쳐왔기 때문이다. 이런 나팔수 노릇으로 「시장경제」를 오염시켜온 자유기업센터를 해체하고 그 기금을 사회에 출연한다면 사소하지만 분명한 재벌 변신의 첫 징표가 될 것이다. 안국신 중앙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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