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 골프매거진]'골프의 발상지' 세인트앤드루스, '골프클럽의 시초' 뮤어필드, 그리고 '세계 최고의 골프장'으로 손꼽히는 파인밸리 골프클럽. 나인브릿지를 세계적인 골프장으로 만들기 위해 다녀온 여정. 이번엔 파인밸리다. 과연 세계 최고는 어떤 코스를 갖추고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 소풍가는 아이의 설렘을 안고 미국 뉴저지 남부에 자리한 파인밸리를 찾은 때는 지난 2004년 6월. 마침 뉴욕의 시네콕힐스에서 US오픈이 열린 터라 이를 참관하고 파인밸리를 방문하려 했다. 미리 연락이 닿은 최경주 선수가 우리 일행을 기다렸지만 끝내 그를 만나지도 US오픈을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골프장 입구부터 족히 4km가 넘는 갤러리 행렬이 도무지 언제 줄어들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 휴대폰 등을 반입하지 못하도록 한 몸수색 때문.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호하려는 철저함이 엿보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입장을 포기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숙소로 예약된 리츠칼튼 호텔이 자리한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펜실베니아주에 속한 필라델피아는 유서깊은 도시다.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가 얼마전 취임식 참석을 위해 가진 기차여행의 시발지도 바로 여기였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자유의 종이 울렸던 이 곳은 워싱턴DC 이전에 미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곳곳에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호텔에서 잠을 청하며 '제발 내일 날씨가 좋아야 할텐데'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소풍 전날 초등학생의 심정이라고 할까? 덕분에 밤새 뒤척여야 했다. 어느새 날이 밝아 커튼을 열자 눈부신 태양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 얼마나 다행이던지. 원더풀~ 원더풀! 철저한 회원 중심제로 운영되는 파인밸리는 비회원 라운드가 하늘의 별따기다. 회원 한 명이 1년 동안 동반할 수 있는 비회원은 고작 21명. 우리는 지난 2002년 나인브릿지에서 펼쳐진 WCC(World Club Championship) 대회에 참가했던 데이비드 브룩슨이라는 회원과 동반 라운드를 하기로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차로 30분 정도를 달려 뉴저지의 파인밸리에 도착했다. 수년 동안 세계 부동의 넘버원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파인밸리 골프클럽. 말로만 듣던 그 명성을 몸소 체험하는 기회가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1913년 조지 크럼프라는 사업가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어 짓기 시작해 1918년 정식으로 개장한 파인밸리. 조지 크럼프는 당대 최고의 설계가였던 해리 콜트, CH. 아리슨, A. 필링히스트 등과 더불어 가장 훌륭한 코스를 만들어나갔다. 크럼프는 5번홀 옆에 집까지 지어 그곳에 머무르며 코스 조성에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나 14개홀만을 완성시킨 채 그는 생을 마감했고, 나머지 4개 홀은 그의 사후에 완공됐다. # 경이로운 코스에 감탄이 절로 일행과 더불어 둘러본 코스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자연을 그대로 보존시키면서도 골프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가령 파4 홀인 경우 볼이 떨어지는 랜딩존만 페어웨이로 조성돼 있고, 티박스 앞이나 그린까지가 자연러프로 이뤄져 있는 식이다. 물론 자연러프에서도 정상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 이처럼 자연친화적이면서 정확한 플레이를 요구하는 코스 레이아웃이 파인밸리가 자랑하는 최대 자산이다. 따라서 골퍼들의 실력차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웬만한 골퍼들은 처참한 스코어를 받아들기 일쑤다. 그렇지만 낙담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에서의 플레이가 '삶의 여정'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힘들고 어려워도 언젠가는 좋은 때가 오리라는 것. 그래서일까? 코스의 주제는 '고독'이다. 최근 톰 파지오가 리노베이션하기도 했다. 특히 세계 최고인 이곳 코스는 파70(6,996야드)으로 조성돼 있다. 골프장 하면 무조건 파72만을 떠올리고 고집하는 우리네 고정관념에 코스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티박스에서는 카트도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름 그대로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난 카트길은 아름다울뿐 아니라 여름에는 더없이 선선함을 안겨준다. 많이 부러웠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지형 여건상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티박스에서 보이던 벙커가 그린에서는 감쪽같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오로지 푸른 자연만 눈에 들어오는 설계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야디지 마크나 거리목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리를 알 수 있을까? 곳곳에 자리한 스크링클러에 번호가 매겨져 있고, 이것으로 캐디가 소지한 야디지북을 통해 거리를 확인할 수 있다. 골프는 자연과의 싸움이므로 골퍼 스스로 판단하고 홀을 공략하도록 너무 자세한 거리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세계 100대 코스의 선정기준 가운데 중요한 요소가 '자연친화성'이다. 아울러 훌륭한 홀이 얼마나 많고, 진부한 홀이 몇 개인지까지 따진다. 파인밸리는 더할나위 없이 자연친화적이며 진부한 홀이 단 한 곳도 없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코스다. 앞서 말한 자연러프 덕에 관리비용도 엄청나게 절감된다. 어떻게 100여 년 전에 지금과 같은 자연친화성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들의 혜안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주변에 깔린 조약돌이 인상적인 L자 모양의 클럽하우스는 맵시나 우아함은 없지만 따스한 환영의 손길을 내미는 듯한 느낌이었다. 멀리서 오는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숙박시설도 갖추고 있다. 그늘집에는 비회원들이 소지한 볼을 기념으로 하나씩 넣을 수 있는 함이 마련돼 있어 세계 각국의 볼 전시장을 방불케한다. # 훌륭한 클럽은 결국 회원들의 몫 이곳 회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도 그럴 것이 회원이 되려면 최소한 10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그만큼 가치와 긍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우리를 초대했던 크리스 랭과 데이비드 브룩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파인밸리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잘 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분명한 공정성과, 언제나 재미와 도전욕을 자극하는 난이도를 갖춘 코스에서 훌륭한 회원들과 즐겁게 라운드하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회원으로는 닉 프라이스, 벤 크랜쇼 등 쟁쟁한 인사들이 즐비하다. 저녁 식사 때는 반드시 클럽자켓을 착용해야 입장할 수 있다. 여성들은 회원이 허락되지 않아 락카도 없고 일요일 오후에만 라운드가 가능하다. 대회는 미국과 영국의 남자 아마추어 국가대항전인 워커컵(Walker Cup)이 1985년에 개최됐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연 하나를 소개한다. 나인브릿지의 운영위원이자 회원인 변호사 한 분이 파인밸리를 꼭 한 번 방문하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내가 평소 알고 지내던 파인밸리 회원에게 부탁을 해 다른 회원을 소개받았다. 노만 스웬슨이라는 이 회원은 우리 회원과 동반 라운드를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여를 날아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회원분은 뉴저지에 사는 다른 지인과 더불어 파인밸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지인은 "여기에 살고 있는 나도 파인밸리를 가지 못하는데, 너는 참 재주도 용하다"며 놀라움을 금치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후 노만 스웬슨이 파인밸리의 클럽챔피언이 되어 2005년 나인브릿지에서 개최된 WCC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런 기막힌 인연도 있구나 싶었다. 우리 회원이 제주를 찾은 노만을 극진히 대접한 것은 물론이다. 이 일로 '클럽 간의 커뮤니티란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갖게 됐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클럽'인 것이다. 파인밸리는 WCC가 처음 개최된 2002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연속 출전하면서 2006년 미국 세이지밸리, 2008년 중국 파인밸리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60세를 넘나드는 파인밸리의 챔피언들은 거의가 싱글핸디캐퍼여서 오는 6월 나인브릿지에서 열리는 WCC에서 또 한 번의 우승에 도전한다. 파인밸리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세계 부동의 1위를 유지하는 비결은 뭘까? 어느 한 홀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코스가 그 이유이겠지만 이에 못지 않게 품격 높은 회원들을 들 수 있다. 이 곳의 회원들은 기부나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회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마다하지 않는다. 결국 좋은 골프장은 좋은 회원들이 만들어간다. 이들에 의해 훌륭한 클럽문화가 창출되는 것이다. 최고의 코스를 누비는 최고의 회원들이 있는 한 파인밸리는 앞으로도 세계 넘버원 골프장의 명성을 이어갈 것이 틀림없다.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뜬 눈으로 지새운 밤 등 고단했던 여정은 파인밸리가 안겨준 보상 앞에서 일순간에 날아가버렸다. ■ 필자 김운용은 클럽 나인브릿지 대표이사. 골프에 대한 지식 및 기여도, 세계 100대 코스 중 50곳 이상의 라운드 경험 등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채우고 지난해 10월 한국인 최초로 골프매거진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으로 위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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