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물가가 떨어져서 걱정이래. 확실히 예전에는 차에 기름 가득 채우면 10만원은 나갔는데 이제 8만원밖에 안 들더라."
"물가가 떨어진다고? 무슨 소리야. 장 한 번 보면 10만원은 나가는데?"
서울에 사는 30대 전업주부 김모씨는 금융권에 종사하는 남편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마트에서 고심 끝에 꼭 필요한 것만 고르고 계산대 바로 앞에서 물건 몇 개를 덜어내기까지 해도 10만원이 훌쩍 넘는데 남편은 물가가 떨어진다니 말이다. 생활비를 줄이려 수작 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다.
경제 주체 사이에 0%대 소비자물가를 보는 생각이 천양지차다. 물가 체감도가 소득에 따라 다른 것은 당연한 현상이지만 남녀 간에도 유별하고 샐러리맨과 자영업자의 차이도 제법 난다. 국제유가가 뚝 떨어지자 상대적으로 주유소를 많이 찾는 남성들은 물가 상승률이 둔화하고 있는 추세라고 느끼는 반면 장바구니와 친숙한 여성은 물가가 계속 오른다고 체감한다. 회사원과 자영업자 간 물가인식 척도는 6년래 최대폭으로 갈렸으며 부자와 소득이 낮은 사람 역시 대립했다.
3일 한국은행의 '1월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물가전망CSI는 남자가 128로 전월보다 2포인트 내린 반면 여성은 1포인트 오른 136을 기록했다. 격차는 2008년 12월(10포인트) 이후 최대다. 남녀 간 물가인식 격차는 6년래 최대로 벌어졌다는 얘기다. 물가전망CSI는 1년 후 물가전망을 묻는 질문에 대한 소비자의 대답이지만 사실상 체감물가를 보여준다. 100을 기준으로 웃돌면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응답자가 많다는 뜻이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비슷하게 움직이던 남녀 간 물가인식이 국제유가가 하락하기 시작한 11월부터 벌어졌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상반기 동조화하던 남녀 물가인식은 11월 4포인트, 12월 5포인트로 간격이 넓어졌다. 이 실장은 "남자는 주유를 많이 하기 때문에 물가가 하락한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여성은 장을 남성보다 많이 보기 마련인데 식료품 가격은 요지부동이고 소득은 오히려 줄어들 판이니 물가가 상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또 지난해 하반기부터 언론에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둔화하는 것과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디플레이션 언급이 집중적으로 실리면서 상대적으로 경제뉴스에 관심이 많은 남성들이 물가가 하락한다고 느꼈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물가인식 차는 회사원, 자영업자 간에도 첨예했다. 봉급생활자의 물가전망CSI는 1월 132로 변동이 없었으나 자영업자는 123으로 5포인트나 급락했다. 격차는 2009년 1월 이후 6년래 최대다. 이 실장은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트럭을 몰기 때문에 저유가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라며 "반면 버스나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는 회사원은 잘 느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광석 현대연 선임연구원은 "자영업자들은 거의 매일 식재료를 구입하기 때문에 물가동향에 민감하다"며 "최근 농산물 가격이 안정된 것도 체감물가를 낮췄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경제뉴스 노출도도 회사원이 높기 때문에 물가인식 차에 일조했다는 분석이다.
소득에 따라서도 인식이 갈렸다. 월소득 500만원 이상자의 물가전망 CSI는 126으로 전월보다 1포인트 내린 반면 100만원 미만은 3포인트 오른 133을 나타냈다. 차이는 2년래 가장 크게 벌어졌다. 저소득층은 승용차 보유 비중이 낮아 유가하락을 체감하지 못했고 경기도 안 좋아 먹고살기 빠듯해지니 물가수준이 높다고 느꼈다. 김 연구원은 "소득수준별로 국민을 5개 등급으로 나눴을 때 최하인 1분위의 지난해 소득이 유일하게 줄었다"며 "소득이 줄어드니 물가가 높게 느껴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유가하락을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게 정책 방향을 잡았으므로 저소득층 등 실제 저유가를 체감하지 못하는 계층을 타깃으로 하는 방안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