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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생 100년] <1> 파산위기서 꽃 피운 해운산업 근대화

4부. 시련은 창조의 산실

그리스 선주 배 인수 거부에 "우리가 사들여 해운업하자" 역발상

미아된 초대형 유조선 3척 인수해 위기 정면돌파

석유메이저사가 가진 한국 원유 수송독점권 되찾고

한국인 특급선장·선원으로 1976년 7월 첫 출항

유럽 최대 항만인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에 입항하고 있는 현대상선 소속의 컨테이너선. 한국의 해운산업이 세계 5위권으로 도약하는 기저에는 위기에 봉착한 아산 정주영의 창조적 발상이 깔려 있다. /사진제공=현대상선

아산 정주영의 결단으로 탄생해 한국해운의 도약 시대를 연 코리아 썬호의 취항식과 코리아 스타호의 항해 장면. 한국 최초의 초대형 국적 유조선으로 해운 운임의 국적화를 통한 수입대체 효과는 물론 원유의 안정적 수급에 크게 기여했다. /사진제공=현대상선

아산 정주영의 결단으로 탄생해 한국해운의 도약 시대를 연 코리아 썬호의 취항식과 코리아 스타호의 항해 장면. 한국 최초의 초대형 국적 유조선으로 해운 운임의 국적화를 통한 수입대체 효과는 물론 원유의 안정적 수급에 크게 기여했다. /사진제공=현대상선


수출 기여도 6위, 수출액(운임) 346억달러. 세계 랭킹은 5위.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현주소다. 간판인 반도체나 조선·자동차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해운은 수출 효자 산업의 하나다. 수출 지향적인 산업구조에 걸맞게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는 한국 해운산업이 도약해온 밑바탕에는 아산 정주영의 뚝심과 창의력이 깔려 있다. 특히 원유 수송과 국적 유조선 확보에 아산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아산이 해운업에 눈을 돌린 계기는 파산 위기. 국제 조선산업의 수급과 국제금융 동향 등을 면밀하게 조사한 끝에 '조선업 진출' 단안을 내려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으나 초기에는 그룹 전체가 도산할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했다. 사상 최단기간에 최대 조선소를 건립하는 동시에 26만톤급 유조선 두 척을 건조한 직후 화려했던 출범 이상의 시련이 찾아온 것. 당장 초대형 유조선(VLCC) 두 척을 인수하기로 약속했던 그리스 선주가 한 척의 인수를 거부하고 나섰다.

현대가 국제 계약 관행에 서투르다는 점을 악용해 단가를 후려치려는 수작이라는 점을 파악한 아산은 정면대응으로 맞섰으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 큰 위기가 찾아들었다. 초대형 유조선 두 척을 주문한 홍콩의 선주가 느닷없이 부도를 맞았다. 국제신용에 의존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던 상황. 시중에서는 '정주영 회장이 무리해서 일을 펼친 끝에 망하게 생겼다'는 말이 나돌았다. 초대형 유조선 3척을 동해에 띄워놓고 놀리게 된 아산은 위기의 한복판에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창조적 발상을 내놓았다. '미아가 된 배를 직접 인수한다.'

해운업에 진출하겠다는 아산의 생각에 누구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선주가 되는 게 말이 쉽지, 한국이 단 한 번도 보유하지 못한 26만톤급 유조선을 세 척이나 갖게 되면 운용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쏟아져나왔다. 자금도 자금이지만 무엇보다 걸프의 벽을 넘기가 어려웠다. 걸프가 어떤 회사인가. 세계 석유시장을 쥐락펴락하던 7개 국제 메이저(the Seven Sisters)의 하나인 공룡 아니던가.

아무도 한국을 주목하지 않던 1962년 외국인투자기업 1호로 대한석유공사에 투자했던 걸프는 한국에서 수입되는 원유의 독점수송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1967년까지 원유수송권 100%를 갖고 있던 걸프는 차츰 국내 해운업체에 수송권을 내줬으나 국내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산은 초대형 유조선 세 척으로 아세아해운(현대상선의 전신)을 설립하고 걸프의 원유수송권 가운데 절반을 가져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마침 요지부동이던 걸프의 원유수송권이 흔들릴 조짐이 보였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국내에서의 걸프의 과도한 과실송금(본사에 보내는 이익 배당금)과 독점 구조로 여론과 국회의 몰매를 맞고 있었다. 두 번째로 한국 정치권에서 더 이상 걸프를 비호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1975년 미 상원 청문회에서 한국의 집권여당에 두 차례에 400만달러의 뇌물이 정치헌금이라는 명목 아래 전달됐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어려운 처지의 걸프였지만 기득권을 순순히 내려놓지는 않았다. 1976년 4월부터 3개월 동안 이어진 장기협상에서 아산은 배수진을 쳤다. '걸프가 양보하지 않으면 원유수송독점권 계약이 만료되는 1977년 말까지 기다리겠다'는 엄포에 걸프는 두 손 들고 말았다. 걸프는 도중에 한국의 관료들에게 '현대를 말려달라'며 측면 지원을 요청했지만 부당 정치헌금이 미국 조야에서 문제가 된 마당에 관료들도 걸프를 도와주지 않았다.

막상 걸프는 현대에 양보했으나 다른 속셈이 있었다. 아산 정주영의 신설 해운사 아세아해운이 초대형 유조선 세 척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결국 걸프에 숙이고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전해진다. 걸프의 셈법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초대형 유조선 운용에 고난도의 기술과 경영기법이 필요하다는 점은 맞았지만 아산을 잘못 봤다. 걸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유능한 초특급 선장 구하기'와 선원 양성을 아산은 해냈다. 물론 처음에는 아산도 당혹감에 빠졌다. 배만 있으면 되겠지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는 점을 안 뒤에는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초대형 유조선을 몰아본 경험이 있는 특급 선장을 구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동생인 정인영 회장의 한라 계열사에서 사람을 찾아냈다. 한국해양대 출신으로 항해 경험 20년에 유조선 선장 경력 10년, 36만톤급 유조선까지 몰아본 베테랑 선장 이승우(당시 42세). 특급선장 이승우는 당시 쿠웨이트의 유조선 회사에서 고액 연봉을 받고 있던 터에 아산의 제의를 받았다. 주저하는 이승우 선장에게 아산은 '걸프와의 원유수송권 협상에서 이겨도 당신이 없으면 동해 바다에 떠다니는 대형 유조선 3척을 움직일 수 없다. 현대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라며 설득했다. 결국 이 선장은 아산의 뜻에 따랐다. 걸프 쪽도 이 선장이 현대에 스카우트됐고 수백명의 선원들이 맹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서는 두 손 들었다. 결국 원유수송독점권의 50%를 1982년 6월 말까지 행사하고 나머지는 한국 국적선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그리스 선주의 선박인 '바로니스'호에서 아세아해운 소속의 한국 국적선 '코리아선(Korea Sun)'으로 이름을 바꾼 한국 최초의 초대형 유조선은 원유를 실어오기 위해 1976년 7월 말 중동으로 첫 항해를 떠났다. '코리아선'호가 쿠웨이트에 도착했을 때 한국인 선장들과 선원들을 감동에 젖었다. 아세아해운 상무 자격으로 첫 항해를 지휘했던 '특급선장' 이승우의 얼굴을 알아본 쿠웨이트의 도선사(파일럿)들이 말을 걸었다. "새 배 같은데, 처녀 항해냐?" "그렇다, 첫 항해다" "이 배 어디서 만든 거냐?" "우리가 만들었다." 벅찬 가슴으로 대답하던 이 상무를 의아한 표정으로 살펴보던 파일럿들은 "그럼 선원도 한국인이란 말이냐"고 물었다. "맞다. 전부 내가 훈련시킨 한국인 선원이다." "그럼 행선지는 어디냐?" "코리아의 울산항이다."

기껏해야 작은 중고선을 몰던 한국이 국산 초대형 유조선을 한국인 선장과 선원이 몰아 쿠웨이트항에 접안하던 당시 옆에 소련 선적의 8만톤 유조선이 정박해 있었다. 이 선장의 회고. "외국에 나가 억세게 일하면서도 쌓였던 20년 한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선원들도 눈물을 흘렸다." 코리아선호의 정식 취항 후 나머지 두 척도 연달아 중동항로를 성공적으로 달렸다. 조선 수요도 살아나고 현대는 조선과 해운에서 막대한 오일달러를 쌓았다. 한국 해운산업이 일거에 최신 유조선을 갖춘 주자로 나선 장면은 순간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세계 6위의 해운 강국으로 이어졌다. 위기를 맞은 아산의 창조적 돌파 발상이 해운업의 엔진으로 작용해온 셈이다. /권홍우 선임기자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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