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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이 국가적 어젠다가 되고 자유무역협정(FTA)이 그 중심에 섰지만 정작 이를 제대로 이끌 ‘협상가’는 많지 않다. 수차례 힘든 전투를 통해 어렵게 육성한 일부 베테랑들마저 낮은 처우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뜨기 일쑤다. 국운을 좌우할 거대 통상협상을 줄줄이 앞두고 통상외교시스템 정상화의 첫걸음을 전문가 육성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미 FTA가 끝난 뒤 일부에서는 ‘승전가’를 부르고 ‘통상영웅담’에 취해 있지만 속사정은 참으로 쓰리게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왜 다 떠나나=정부 내 통상업무를 총괄, 조정하는 곳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다. 지난 98년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외무부에 통상교섭본부가 합쳐져 외교통상부가 됐지만 외교부에서 통상직은 말 그대로 찬밥신세다. 외통부가 아닌 소위 ‘외교부’를 지향하는 외교관들과 이에 동화된 일반관료들 사이에서 “통상교섭본부는 외교부의 2중대도 안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는 실정이다. 통상교섭본부에서 계약직 전문관으로 있는 한 관계자는 “외교부에서 정무직에 있다 통상직으로 옮기면 다 ‘좌천’으로 여긴다” 며 “통상본부에는 정무직으로 돌아가려 애쓰거나 해외공관 발령으로 권토중래를 하려는 인사들이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통상본부 관계자는 “외시 출신 일부 고위관료는 통상직을 외교관들의 인사적체를 해소하는 통로로밖에 여기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주무부처인 외교부에서만 통상직이 미운 오리새끼는 아니다. 98년 통상업무가 떨어져나가 통상산업부에서 이름이 바뀐 산업자원부는 여전히 통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지만 10여년이 지나자 통상기능 및 역량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산자부의 한 관계자는 “통상업무가 부차적인 수준으로 인식돼 주요 인력들이 산업이나 자원정책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개방확대로 업무영역은 줄고 거센 농민반발에 직면해야 하는 농림부 역시 통상직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경제 총괄부처인 재정경제부에서는 경제정책 및 조정, 세제, 금융정책 등에 가려 통상 부문을 제대로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한미FTA협상단의 한 고위관계자는 “오죽하면 협상 중간에 분과장직도 박차고 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겠냐”고 꼬집었다. ◇“통상전사는 없다”=제대로 된 통상시스템이 갖춰지지 못하고 통상의 중요성조차 간과되면서 사각의 테이블을 마주하며 상대국과 전쟁을 벌일 실력 있는 통상전사는 찾아보기 힘든 편이다. 8차례에 걸친 한미 FTA 공식협상에서 협상단 수는 평균 200대100으로 우리 측이 2배 많았다. 협상단 관계자는 “밀리는 전문성을 협상단 규모를 늘려 보완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했다. 미국 측은 1차협상에 178명을 보내 우리 측의 146명보다 많았지만 우리측 전력을 확인한 2차 이후부터는 꾸준히 80여명을 유지했다. 우리 측은 2차협상에 270여명을 내보내 가장 많았다가 5차협상에서는 100여명이 줄어든 170여명을 출전시켰다. 협상단의 소속부처 및 연구기관 수도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며 우왕좌왕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예인력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며 “보안유지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고백했다. 통상협상에서 2명이 1명과 싸운다고 해서 우세한지도 의문이다. 한미 FTA 협상에 참여한 한국노동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협상, 특히 통상협상 기술은 1, 2년에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10년, 20년 통상문제만 붙잡고 살아온 전문가들을 따라잡는 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실제 막판까지 한미 FTA 자동차협상에서 미국 측이 자국 관세철폐안을 제시하지 않으며 이를 지렛대로 이용, 요구사항들을 관철시켜나가자 협상단 관계자는 “얄밉지만 솔직히 협상을 너무 잘한다”고 말했다. 최석영 주미대사관 경제공사는 “미 무역대표부(USTR)에 오랫동안 통상협상을 전문으로 해온 인사들이 많은 것은 미국의 큰 자산”이라며 “우리도 전문 통상관료와 전문가를 육성하는 데 많은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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