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9일 일본계 금융자본인 오릭스프라이빗에쿼티(PE)는 1년 넘게 끌어오던 현대증권 인수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매각 초기부터 제기됐던 파킹딜(Parking Deal·외부에 지분을 맡겼다가 나중에 다시 되사오는 거래) 논란이 정치권에서 나오자 부담을 느낀 일본 본사가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현대증권 매각은 지난 2013년 말부터 시작된 현대그룹 구조조정의 마지막 단계로 평가됐던 만큼 거래 당사자인 현대그룹과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 금융당국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릭스PE의 현대증권 인수 포기는 최근 규모가 커지고 있는 국내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국내 M&A시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국내 M&A 총 거래금액은 2009년 479억달러(851건)에서 지난해 950억달러(1,057건)로 2배 이상 늘었다. 올 들어서도 지난 3·4분기 누적 기준 858억달러(945건)로 전년 수준을 무난히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런 양적성장과 달리 국내 M&A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쏠림현상이 두드러진다. 최근 삼성과 롯데그룹 간 화학사업 M&A처럼 선제적인 사업재편 과정에서 나오는 자율 빅딜보다는 유동성 위기를 겪거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업들이 마지못해 매물로 나와 거래되는 '네거티브(Negative) 딜'이 압도적으로 많다.
현대증권은 2013년 말 현대그룹이 3조3,000억원 규모의 자구안을 마련할 때 현정은 회장이 막판까지 매각 리스트에 넣기를 주저했던 알짜 매물이다. 현대그룹은 당시 그룹 재무구조 개선 의지를 시장에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채권단의 설득에 못 이겨 현대증권을 내놓았다. 하지만 현대증권이 막상 M&A 매물로 나오자 시장의 평가는 냉정했다. 올 초 현대증권 본입찰에는 사모펀드(PEF) 운용사 2곳만 참여했고 오릭스PE가 우선협상대상자가 됐다. KB금융과 같은 전략적투자자(SI)들은 관심을 갖지 않아 실질적인 인수 가격(4,500억원)은 주가순자산비율(PBR)의 0.7배 정도에 머물렀다. 당시 현대그룹은 1조원 안팎을 기대했지만 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온 네거티브 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정책금융기관의 대표를 역임한 한 금융권 인사는 "기업 M&A는 거래 상대방이 약간의 빈틈만 보이면 가격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약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전쟁터" 라며 "그룹의 부실 뒷정리 과정에서 나온 기업은 시장의 평가가 인색할 수밖에 없고 해당 매물이 아무리 알짜라도 협상의 주도권을 인수자 측에 빼앗기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2013년 말부터 산업은행 주도로 진행된 동부그룹 구조조정도 실기한 측면이 커 동부제철 인천공장 등이 매각에 실패한 바 있으며 채권단 주도로 역시 매각을 추진했던 동부하이텍도 적당한 인수자를 찾지 못해 매각작업이 잠정 중단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시장은 최근 금융당국이 밝힌 산은의 비금융자회사 매각 방침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금융당국 계획대로 3년 안에 무려 91곳에 달하는 매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질 경우 가뜩이나 네거티브 딜이 다수인 국내 M&A시장에 병목 현상만 심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채권단 주도의 M&A는 시장 상황을 봐가며 시기를 조절하고 기업 간 자율적인 M&A가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국내 상위 10대 그룹의 경우 최근 들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핵심사업을 선택한 후 불필요한 사업을 정리하는 등 사업 재편에 시동을 걸고 있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한화에 이어 올해 롯데와 빅딜을 성사시키며 화학과 방위산업 부문을 정리했다. SK그룹은 CJ헬로비전을 인수하면서 주력인 통신·플랫폼 부문을 더욱 강화했고 해외사업 확대를 추구해온 CJ는 성장전략과 거리가 있는 비핵심사업을 매각했다. 대기업들이 필요하다면 알짜사업부를 과감히 처분하고 그룹의 미래와 직결된 핵심 사업이 아닌 경우 과감히 매각에 나서는 것이다. 홍종성 딜로이트안진 재무자문 본부장은 "각 그룹의 오너들이 국내 산업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오너십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딜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우기자 ingaghi@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