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 한 분(라이트 형제의 아버지)*이 ‘노아의 홍수 다음의 대홍수’라고 절규한 물난리가 있다. 데이턴 대홍수(Great Dayton Flood).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20세기 초 발생한 홍수다. 수십만씩 죽어 나간 다른 재앙보다 규모는 작지만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있다. 체계적인 방재 시스템과 함께 교훈을 줬기 때문이다. ‘물의 흐름은 자연에 맡기라’는.
데이턴 대홍수의 재앙은 하나씩 하나씩 잔인하게 찾아왔다. 화창한 봄 날씨에 불쑥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자 땅이 얼어붙어 강물은 지표면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급류로 바뀌었다. 나흘째 폭우가 계속되던 1913년 3월 25일 자정, 데이턴시 경찰은 긴급 대피 사이렌을 울렸다. 근심에 젖어 있던 시민들은 한밤을 찢는 경적음에 집에서 뛰어 나왔다.
불어난 마이애미 강물은 곧 제방을 넘어 도시 남쪽 금융가를 삼켰다. 대피 명령이 발동된 지 90여 분이 지난 이튿날 새벽 1시 30분께, 불어난 강물은 유실된 제방을 타고 도심을 덮쳐 빌딩의 3층 높이인 6.1m까지 차올랐다. 재앙은 물에서 그치지 않고 불도 불렀다. 가스관이 터지며 물에 잠기지 않은 도심 대부분이 불탔다. 물이 빠져나간 27일, 번영하던 신흥도시 데이턴에는 폐허만 남았다.
폭우가 내린 엿새 동안 나이아가라 폭포가 한 달 동안 떨어트리는 만큼의 강물에 휩쓸렸다는 데이턴시는 인명 피해도 컸다. 362명이 죽고 가옥 2만 여채가 파괴돼 수재민 6만 5,000명이 추위와 공포에 떨었다. 피해액은 1억 달러(요즘 가치 104억 달러; 비숙련공 임금 상승분 기준)에 이르렀다. 수마(水魔)는 데이턴시 뿐 아니라 오하이오주 전역과 인접한 인디아나주도 할퀴었다. 작은 피해를 입은 주까지 합쳐 20개 주의 사망자 합계가 650명 이상에 수재민 25만 가구, 총 추정 피해액 3억 3,300만 달러(요즘 가치 346억 달러).
데이턴의 재앙은 이전까지 세계최대의 수해로 90만~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1887년 중국 황하 대홍수에 비하면 대(大)를 붙이기도 힘든 조족지혈이었으나 미국인들의 놀라움은 컸다. 미국 최대 수해인 1889년 펜실베이니아주 존스타운 홍수(2,209명 사망) 이래 최대 피해였다.**
데이턴 대홍수는 혁신도 가져왔다. 데이턴 지역의 금전등록기 생산업체이던 NCR의 사장 패터슨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안겨줬다. 비가 쏟아지자 패터슨은 직원들에게 급히 보트와 빵을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제방이 무너진 날 NCR 직원들은 급조한 275대의 보트와 2,000여개의 빵으로 이재민 수천여명을 구해냈다. 패터슨은 의용소방대와 적십자 단체, 현장 기자단에게 NCR 본사를 숙소 겸 사무실로 제공, 용기와 선행의 주인공으로 전국적인 뉴스를 탔다.
마침 패터슨은 깡패를 동원해 경쟁기업주를 위협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직후였으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패터슨과 임직원들의 죄를 모두 사면해줬다. 고무된 패터슨은 비에 젖은 금전등록기를 전액 보상하면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굳혔다.***
데이턴이 고향이자 근거지였던 라이트 형제도 기회를 얻었다. 비행기를 타고 광범위한 피해 지역을 담은 필름의 해상도나 시각은 이전까지의 보도, 기록사진과 격이 달랐다는 평가 속에 항공사진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가장 큰 변화는 데이턴 플랜. 재해를 당한 시민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고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1795년 도시를 설계할 때 ‘반복될 수해를 조심하라’는 경고대로 10년 단위로 물난리를 겪어온 터. 오하이오주는 데이턴시에 퍼부었던 비의 1.4배가 와도 견딜 수 있는 재해방지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근본은 물길을 자연에 맡기자는 것. 1914년 오하이오주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자연보존법령을 통과시켰다. 인공 운하를 파기보다 철도를 이용하고 댐은 홍수 조절용에 국한한다는 데이턴 플랜은 지금까지도 치수계획의 모범으로 꼽힌다.
미국 동남부의 자랑거리이며 관광자원이라는 마이애미 자연보호구역도 이때 생겼다. 운송정책도 크게 바뀌어 가뜩이나 철도에 밀리던 오하이오 운하가 완전 폐쇄됐다. 다른 주도 뒤따라 인공 운하를 버렸다. 102년 전 데이턴 대홍수는 인공 물길의 폐해를 알린 경고장이었던 셈이었는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땅에서는 4대강 사업의 재정 낭비와 자연 환경 파괴 논란이 그치지 않으니.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비행기를 처음 날린 라이트 형제의 아버지 밀턴 라이트(Miton Wtight) 주교. 독일 개혁종파에서 비롯된 미국 복음교파의 하나인 그리스도 형제 연합교회(Church of the United Brethren in Christ)의 주교로 데이턴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노아의 홍수 이래 두 번째’라는 말을 남겼다.
** ‘데이턴 대홍수’는 ‘노아의 홍수 다음의 대홍수’가 아니라 기록된 인명 피해 기준으로는 115번째 대홍수에 해당된다. 가장 큰 수해 기록은 1931년 중국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중국 대홍수는 250만~4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최악의 물난리는 1925년 을축년 물난리(사망 697명) 1972년 8월 서울 대홍수(사망 529~672명)가 꼽힌다. 북한에서도 2006년 대홍수로 844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료 부족에 따른 삼림 파괴로 수해 피해가 더욱 커졌다.
*** 패터슨은 명성을 얻은 뒤 반독점법 위반 판결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는지, 주요 임원들을 잘랐는데 그들 중 하나가 영업 부사장 톰 왓슨. NCR에서 쫓겨난 왓슨이 세운 회사가 IBM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