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이 있었던 지난해 11월26일. 영하 3도의 추운 날씨에도 48명의 구리시립소년소녀합창단은 고인이 평소 좋아하던 추모곡 ‘청산에 살리라’ 한 곡을 부르기 위해 1시간30분 동안 얇은 단복만 입은 채 추위에 떨면서 기다려야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지만 관련 법규나 지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의 보호자인 부모들도 특별한 조치에 나서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어린이날을 앞둔 3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영혜(사진) 국가인권위원회 아동권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은 “당시 어린이합창단의 장면을 보고 인권활동가들이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는데 막상 아동의 법적대리인인 부모들은 적극적이지 않아 당사자가 원하지 않으면 조사를 할 수 없는 인권위 규정에 따라 조사를 하지 못했다”며 “이에 행정자치부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행사에 아동이 참가할 때 준수해야 할 지침을 마련해 보급하라고 권고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인권위 안에 신설된 아동권리위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아동권리위는 아동 인권 침해에 대한 진정이 들어오면 조사하고 권리구제에 나서거나 정부에 정책이나 지침을 마련하도록 건의하는 역할 등을 한다. 특히 지난해부터 아동학대가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이와 관련한 아동권리위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김 위원장은 “아동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고 생활 수준이 개선되면서 아동 권리와 관련된 진정은 크게 느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로 인권위에 접수된 아동 권리 진정 건수는 지난 2013년 412건에서 지난해에는 550건으로 33.5%나 증가했다.
흔히 아동 인권이라고 하면 최근에 논란이 된 가정 내 아동 폭행을 비롯해 폭력과 관련된 것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폭력도 문제지만 아동들이 교사나 부모 등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으로부터 모멸감을 느꼈다고 하는 ‘인격권’의 문제가 진정의 다수를 차지한다”며 “아버지가 형사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경찰이 아동의 학교로 찾아와서 취조하거나 교내 폭력사건을 조사한다고 한밤중에 피해학생을 불러내는 등의 인권 침해가 아직도 만연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사회 환경 변화에 따른 새로운 유형의 아동 인권 침해에 대한 대응도 인권위의 역할이다. 인권위는 강제력이 없다는 점에서 그 실효성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강제력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새로운 유형의 아동 인권 침해에 신속한 대응을 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최근 스마트폰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성(性)매매 등에 연루된 아동들이 늘고 있지만 현재 법으로는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할 수 없다”며 “이런 문제들 대해 한발 앞서 정책 권고를 하고 진정을 받아 조사에 나섬으로써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양사록기자 sa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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