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류훈 감독의 영화 ‘커튼콜’은 바로 이 배고픈 연극배우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관객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인 대학로 지하 소극장에서 숨을 헐떡이며 옷을 벗고 뒹구는 연기를 해서 알량한 돈이라도 벌어야 하는 삼류 에로연극 배우들이 연극의 왕도라 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무대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커튼콜’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실제로 연극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다. 연극인생만 50년을 넘긴 대배우 전무송을 비롯해 셰익스피어도 씹어먹을 천재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지금은 그저 삼류 에로연극 연출자인 ‘민기’를 연기한 장현성, 유행어 몇 개만 남기고 사라진 개그맨 출신의 에로연극 프로듀서 ‘철구’를 연기한 박철민 등 배우들 대부분은 인생의 20대와 30대를 ‘커튼콜’ 속 그들처럼 배고픈 연극배우로 지냈다. 하지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연극을 했던 그 시절이 과연 그렇게 고통스럽기만 한 기억이었을까?
영화 ‘커튼콜’의 개봉을 앞두고 6일 서울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커튼콜’에 출연한 박철민을 만났다. 박철민은 이 자리에서 연극배우로 살았던 젊은 시절이 비록 배는 고팠을지언정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자부했다.
지금이야 영화나 드라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배우지만 박철민의 연기인생은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 그러했듯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고교 시절 연극반에서 시작해 대학교 연극동아리를 거치며 배우의 꿈을 키워온 박철민은 대학을 졸업하고 1988년 노동연극 전문극단 ‘현장’을 통해 연극배우로 첫 발을 디뎠다.
박철민은 수많은 연극무대에 서면서 독보적인 코믹 캐릭터를 갈고 닦았고, ‘늘근도둑 이야기’나 ‘대한민국 김철식’과 같은 대학로의 인기작에서 주인공도 맡았다. 하지만 박철민이라는 배우의 존재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연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도 1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2004년에 개봉한 영화 ‘목포는 항구다’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조폭 ‘가오리’ 역할을 맡아 “쉭쉭,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충무로에서 명품 조연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 무대를 지켜 왔냐고 물어봐요.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무대를 지킨 것이 아니라, 무대가 우리를 지켜 준겁니다. 무대가 우리를 받아줘서 우리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죠.”
박철민에게 그의 20대와 30대를 함께 한 연극배우 시절은 너무나도 배고픈 시절이었다. 하지만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라는 말처럼 그 시기는 배는 고팠지만 박철민의 인생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배고픈 시절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배부른 시절이었고, 몸은 힘들어도 그 어느 때보다 신나고 재미난 순간이었죠. 공연 앞두고 며칠 밤을 못 자도 피곤하지 않고, 돈이 없어 밥 대신 라면으로 몇 끼를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그 때는 정말 가끔 먹는 삼겹살과 소주가, 그리고 어쩌다 성공한 선배가 사주는 치킨에 맥주가 그렇게 맛있었어요. 지금은 제일 비싼 치킨을 먹어도 맛있지가 않아요. 그때는 퍽퍽한 닭가슴살도 그렇게 맛있고, 닭다리는 황금다리처럼 느껴졌는데.”
“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 비록 경제적으로 힘들고 남들이 보기에 객관적으로 가난하더라도 모든 연극배우들은 행복하다고. 배고픈 고통보다 무대에 올라서 연기하는 짜릿함이 훨씬 행복하다고.”
그러고 보면 영화 ‘커튼콜’에도 에로연극 제작사 대표(김홍파 분)의 입을 통해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에로연극 하기를 거부하는 연출자 민기(장현성 분)와 프로듀서 철구(박철민 분)에게 배고픈 ‘햄릿’보다 배부른 ‘에로 연극배우’가 더 낫다며 더 벗기고 더 야한 연극을 하라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배부른 에로 연극배우란 것은 없어요. 에로배우를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은 있을지언정. 나는 무대에 서고 싶은데 다른 연출자들이 안 불러주면 결국 에로연극말고는 무대에 설 수 밖에 없는 거지. 그렇다고 딱히 배부른 연극배우가 있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영화 속 그 말을 의역하면 배부른 직업과 배고픈 연극배우라고 하면 될 것 같네요.”
“사실 연극을 하다 배고파서, 힘들어서 좀 여유가 있는 영화나 드라마로 가는 배우도 있어요. 그런데 굳이 그걸 배고픔 때문에 연극을 안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만 해도 ‘인천상륙작전’이나 ‘구르미 그린 달빛’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하면 개런티를 여유 있게 받으니 연극 몇 편 정도는 노 개런티로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거든. 저는 삼성 회장 자리를 저한테 준다고 해도 배고픈 연극배우가 더 좋아요. 돈은 그저 우리 애들 학원 보내고 세뱃돈이나 두둑하게 챙겨줄 수 있고, 비싸지는 않아도 맛있는 안주에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커튼콜’은 지난해 11월에 촬영됐다. 하지만 촬영을 마치고도 무려 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커튼콜’의 배우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은 하루에도 수십 개의 카톡이 난무하고 있다. 박철민조차도 “작품을 끝내고도 1년 내내 이렇게 시끄러운 카톡방은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을 정도라고. 하지만 박철민에게는 그 소란이 그렇기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소란스러움이 박철민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100억 대 제작비의 블록버스터가 한 해에도 여러 편 쏟아지는 시대에 제작비가 채 5억도 되지 않고 배우들이 제대로 된 개런티조차 받지 못한 작은 영화지만, 다들 같은 고민으로 20대를 보내온 ‘연극배우’들이기에 그들과 함께 소란을 피우는 그 시간조차도 정겨운 것이다.
“촬영을 마치고 1년이 지나면 잊혀져야 되는데 ‘커튼콜’은 아직도 그 과정들이 다 기억이 나요. 그만큼 뜨겁게 찍은 영화였고, 아직도 단톡방에서 그 배우들과 슬픈 일, 좋은 일 다 이야기하고 있어. 정말 시끄럽고 귀찮은데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단톡방을 나갈 수가 없는 거야. 형제고 가족인 거지. 어릴 때 보면 가난한 집이 형제들끼리 아웅다웅해도 나중에 보면 서로 잘 챙겨주고 살잖아요? ‘커튼콜’이 그런 영화에요. 돈이 없으니 홍보도 우리가 직접 몸으로 때우고, 그러다 보니 관심과 사랑도 더욱 커졌어요.”
/원호성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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