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전쟁 귀신, 임표’ 탈출 사건





1971년 9월 13일 오전 2시 30분, 몽골 고비 사막의 분지. 새벽의 적막을 찢는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사막에 추락한 영국제 트라이던트 여객기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탑승자는 모두 린뱌오(임표·林彪·당시 64세)를 포함해 9명. 모두 죽었다. 린뱌오가 누구인가. 중국 공산당 부주석, 국무원 제 1부총리, 국방부장(장관)을 맡고 있는 실세. 마오쩌둥(毛澤東 )의 후계자로 낙점받았던 인물이다. 중일 전쟁과 국공내전의 중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전쟁 귀신’이라고도 불렸던 린뱌오가 왜 여객기 추락사고로 죽었을까.

사고 발생 5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인에 대해서는 분석이 구구하다. 중공 당국이 사고 10개월이 지나 발표한 추락 원인은 연료 부족. 최근 밝혀진 러시아와 몽골 정보기관의 보고서에는 추락 원인을 ‘조종사 실수’로 결론지었다. 중공이나 소련이 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켰을 것이라는 풍문도 돌았다. 해석은 제각각이어도 분명한 사실이 세 가지 있다. 먼저 린뱌오의 탈출은 중공 지도부 내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 두 번째, 린뱌오 사망은 마오쩌둥 시대의 폐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세 번째, 덩샤오핑 (鄧小平 ) 복권 등 공산당 지도부가 교체되며 중공은 개혁의 길로 한 발짝 들어섰다.

중공 당국은 린뱌오 사후 온갖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각종 선전 매체들은 쿠데타와 마오쩌둥 암살 미수가 발각돼 조국을 등졌다고 퍼트렸다. 린뱌오의 이미지는 ‘9.13 탈출 사건’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인민의 영웅이자 자랑거리에서 천하의 역적으로 곤두박질쳤다. 린뱌오가 애초에 근무했던 군대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 린뱌오의 황푸군관학교 생도 시절 교장이 장제스, 정치주임이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장제스는 국민당군을 떠나 홍군으로 떠난 린뱌오를 평소에도 ‘황푸군관학교가 낳은 최대 인재, 전쟁의 귀신’이라고 추켜세웠다.

생도 시절, 구보(달리기)에서 늘 낙오하고 몸집도 왜소한데다 병약했지만 린뱌오는 싸움터에서만큼은 펄펄 날았다. 국민당군 3개 사단에 해당하는 2만 5,000여 명을 포로로 잡은 적도 있다. 일본에 맞서 함께 싸우자는 제 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군 소속의 팔로군 115사단장을 맡아 전투 하나로 ‘중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9월 산시성(陝西省) 펑싱관(平型關)에서 일본군 5사단을 격멸, 중일 전쟁 개전 이래 연전연패하던 중국 측에 최초의 대승을 안긴 것. 하지만 중일전쟁에서 활약은 거기서 그쳤다. 전리품으로 얻은 일본군 망토를 입고 말을 타던 중 적으로 오인한 국민당군의 사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탓이다.

린뱌오의 부상 소식에 장제스가 사과 편지를 보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특사를 보내 ‘린뱌오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4년간 소련에 머물며 치료받던 린뱌오는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과 진공 경로를 정확하게 예측해 스탈린으로부터 ‘소련군 장성 15명과 바꾸고 싶다’는 찬사를 받았다. 1942년 귀국해서도 린뱌오는 조용히 살았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 게 생활 철학이었던 린뱌오가 군인으로서 위명을 다시금 확인한 것은 국·공 내전기. 일본의 패망으로 공동의 적이 없어진 국민당군과 공산군이 대륙을 놓고 싸울 때 린뱌오는 만주 지역에서 승리하며 불리한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동북 3성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린뱌오는 13개 성에서 국민당군에 승리를 거뒀다.



전쟁 영웅인 린뱌오는 문화혁명을 타고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던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마오쩌둥을 옹호해 저우언라이에 버금가는 2인자로 인정받았다. 마오쩌둥은 공공연히 ‘후계자’로 린뱌오를 지목하고 당 규약에서 명시했다. 군대를 장악한 린뱌오의 권력이 커지며 마오쩌둥은 특유의 견제에 나섰다. ‘린뱌오가 쓸데없이 자신을 신격화한다’고 비판하며 둘의 사이는 서서히 틀어졌다. 린뱌오와 그 측근들이 당의 승인도 없이 ‘1호 계획’이라는 소련과 전쟁 계획을 작성하자 마오쩌둥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린뱌오는 최고 지도자만 쓸 수 있는 ‘1호’라는 용어를 쓰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자초한 것이다.

국가 주석직 신설을 놓고 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자신을 제치고 주석 자리에 오르고 싶어한다고 여겼다. 공식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비판이 이어지자 린뱌오는 위협을 느끼고 망명길을 택했다. 중공 당국은 린뱌오 부부와 아들의 탈출 계획을 미리 알았다. 린뱌오의 딸 린리형이 ‘대의를 위해 가족도 버린다(大義滅親)’는 마음에서 탈출 계획을 당국에 알렸기 때문이다. 린뱌오 일행은 13일 자정께 숙소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비행기에 오르는 과정에서 총격전까지 벌였다.

김명호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저서 ‘중국인 이야기’에 따르면 현직 국방장관이며 혁명 동지인 린뱌오의 망명과 추락 사고는 마오쩌둥에게도 충격을 안겼다. 눈에 띄게 쇠약해진 그는 린뱌오 사망 5년 뒤 죽었다. 마오쩌둥과 주언라이등 중국 수뇌부는 린뱌오의 세력을 정리하기 위해 덩샤오핑을 복권시켰다. 덩샤오핑은 중국을 개혁하며 21세기의 초석을 깔았다. 북한도 린뱌오 추락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북한의 김일성은 친 자식 말고 믿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1974년 김정일에게 당의 중책을 맡겼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