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적으로 최고경영자(CEO)를 물갈이할 타이밍이 아닙니다. 경기침체의 파고가 이미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야전사령관 교체가 가능하겠어요?”
3일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2019년 정기 임원인사를 예상해달라’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주력 업종의 부진으로 신상필벌 관점에서 봐도 승진 대상자가 적을 수 있는데다 내년에는 실물 경제위기 가능성마저 나온다”며 “조직 수장을 바꾸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짚었다.
연말 그룹 인사의 핵심 키워드로는 ‘안정적 성장’이 꼽힌다. 이는 CEO 교체 최소화와 맥이 닿아 있다. 실제 LG·GS·LS 등도 사장급 CEO 승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는 인사를 코앞에 둔 삼성전자(이르면 4일), SK그룹(6일) 등에서도 감지된다. 최고위 물갈이 수요보다는 젊은 피나 외부 전문가 수혈 등에 방점이 찍힐 것으로 보인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통상 분쟁에 정책·입법 리스크까지 겹쳐 기업들이 인사에 보수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①세대교체 최근 1~2년 새 대거 단행=SK그룹은 2년 전인 지난 2016년 주요 계열사 CEO를 대거 바꿨다. 조대식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등 현재 라인 업이 꾸려진 것이 이때다. 그런 만큼 이번 연말 인사에서는 조직 개편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당장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SK하이닉스·SK텔레콤의 CEO는 유임될 가능성이 크다. 시장에서는 그나마 SK㈜ 계열사, 이노베이션 자회사 등 일부 CEO가 바뀔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자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난해 당시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자진사퇴하며 10월 말 조기 인사를 단행했던 삼성전자는 세대교체를 위해 ‘60세 이상 CEO 용퇴’라는 기계적 잣대를 댔다. 김기남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 김현석 소비자가전(CE)부문장, 고동진 IT·모바일(IM)부문장의 3인 체제는 그 결과였다. 사업부문장의 경우 대체로 3~4년의 임기를 보장하는 것이 관례이고 출범한 지 1년 된 대표를 바꾸기에는 실적 등의 객관적 지표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3각 편대가 변화 없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나마 올 4·4분기 19.6%(생산량 기준, 트렌드포스)의 점유율로 애플(19.7%)에 추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IM사업부가 불안하지만 실적 저조가 글로벌 업황 부진 탓이 크다는 점에서 교체될 확률은 낮다. 진교영 메모리사업부장, 강인엽 시스템LSI사업부장, 정은승 파운드리사업부장, 한종희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등 사장급 부장 자리도 지난해에 승진해 유임될 가능성이 크다. 전자 업계의 한 임원은 “지난해의 경우 ‘재계 인사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 삼성부터 세대교체 바람이 불면서 그 열풍이 거셌다”며 “달리 말하면 올해는 그런 수요가 줄어들 여지가 크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②다가오는 실물발 경기침체…베테랑 내공 필요=경제위기에 대한 우려도 보수적 인사의 한 요인이다. 경기착시론을 낳을 만큼 초호황을 구가한 반도체마저 경기둔화론에 시달릴 만큼 경기가 좋지 않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실물발 경제위기까지 거론된다. 외환위기(1997년)와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 등이 모두 금융발 위기였고 급성 폐렴에 비유될 만큼 갑작스러운 위기였다면 이번에는 주력 산업의 경쟁력 하락이라는 만성적·구조적 악화가 빌미가 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미증유의 산업 변화 속 위기라 해법 찾기가 더 어렵다. 경제단체의 한 임원은 “기업 입장에서는 태풍 상륙에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며 “전쟁 중에 베테랑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나가야 한다”고 진단했다. 실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그룹 이익의 80%를 차지하는 반도체 기업마저 납작 엎드리고 있다. 삼성의 경우 지난해 승진자 221명 중 99명이 DS 부문에서 나왔지만 올해는 예측이 더 어렵다.
③지배구조 이슈 등 민감한 현안 산적…조직개편에 방점=그룹마다 속사정도 적지 않다. 삼성전자만 해도 내년 초 이재용 부회장의 최종심이 있고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 재판이 진행 중인 삼성 노조 와해 사건 등 현안이 하나둘이 아니다. 지배구조 등을 겨냥한 공정거래법·상법개정안 등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도 기업들이 내부 단속에 치중하게끔 하는 변수다. GS그룹에서는 허세홍 GS칼텍스 사장 등 4세 경영인을 대거 경영 전면에 내세웠는데 그룹에 안정감을 부여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인물 교체는 수장 교체가 아닌 젊은 피 수혈에 무게가 실렸다”며 “조직개편의 경우 인공지능(AI)·전장 등 미래 성장동력 육성과 맞물려 더 주목을 받고 있다”고 촌평했다.
LG는 특히 상무 교체가 많았다. 2004년 완료된 GS와의 계열분리 이후 최대(134명)였다. 4차 산업혁명으로 리더 육성이 필요하고 조직의 역동성을 높이려는 차원인데 다른 그룹도 같은 경로를 밟을 개연성이 크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이달 하순 쇄신 차원의 인사가 예상된다. 그룹 내 6명의 부회장 거취가 최대 관심거리다. 재계의 한 인사는 “현대차그룹에서 갑작스러운 세대교체를 대규모로 진행한 적이 많지 않았던 만큼 실적이 좋지 않은 올해는 과도기적 인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상훈·박성호·양철민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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