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취임 1년 만에 돌연 사의를 표명하면서 ‘재판거래’ 의혹을 둘러싼 사법부 최고위층 간 내홍이 표면화됐다. 안 처장은 ‘피로 누적’을 호소하며 대법관 업무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나 결국 ‘재판거래’ 의혹 수사 대응을 둘러싼 김명수 대법원장과의 견해 차이로 물러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가뜩이나 법원 내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김 대법원장 취임 1년3개월 만에 김소영 전 법원행정처장에 이어 안 처장까지 2명의 행정처장이 이례적으로 교체되자 김 대법원장은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는 진단이다.
안 처장은 3일 출근길에서 취재진과 만나 “법관은 재판할 때 가장 평온하고 기쁘며 재판에 복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사의 표명을 공식화했다. 그는 “육체적·정신적으로 힘이 많이 들었다”며 “(처장 재직기간이) 1년에 불과하지만 평상시의 2년보다 훨씬 길었다”고 말했다. 재판거래 의혹과 관련해 법원 자체 조사를 이끈 것은 물론 사상 유례없는 검찰 수사까지 대응해야 했던 자신의 고충을 부각한 발언이었다. 김 대법원장과의 갈등설에 대해서는 “대법원장과 큰 방향에서 다를 바가 없다”고 일축하면서도 “세부적인 의견 차이를 갈등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말해 두 사람 간 견해 차이가 존재했음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갑작스러운 그의 사임이 김 대법원장과의 갈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안 처장은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없는데다 특정 성향을 내비친 적도 없어 임명 때부터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의 진상을 밝히고 개혁 기조를 완수하는 데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안 처장은 법원 자체 조사, 검찰수사, 사법개혁안 마련 등 재판거래 의혹과 관련해 각 단계마다 김 대법원장과 엇박자를 보이며 권한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장 시절 “블랙리스트는 없었으며 형사조치도 필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지난해 6월 재판거래 의혹 파일 추가공개 요구 여론이 고개를 드는 상황에서도 “쓰레기통에 버려진 문건”이라며 반대 의사를 수차례 내비쳤다. 같은 해 11월 취재진을 만난 자리에서는 전날 발생한 김 대법원장 화염병 투척 사건에 대한 질문에 뜬금없이 “아무리 (사법부의) 병소(병이 난 부위)를 많이 찾는다고 하더라도 해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검찰 수사를 나무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같은 기간 줄곧 의혹을 기정사실화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강조한 김 대법원장의 행보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안 처장의 사의 표명으로 김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다시금 위기를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선 법원 내 갈등이 이제 사법부 최상층부로까지 번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앞서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1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임명한 김소영 전 법원행정처장을 6개월 만에 사실상 경질하고 안 처장을 자리에 앉혔다. 그때도 표면적 이유는 ‘김 전 처장의 재판 업무 희망’이었다. 법원행정처장은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 13명 가운데 1명이 맡는다. 따로 임기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통상 2년 재직을 관례처럼 따라왔다.
안 처장의 후임은 조재연 대법관이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서 처음 임명된 대법관이기는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제청한 인물이다. 유력 보수인사인 황교안 전 국무총리와도 성균관대 재학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황 전 총리가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2013년 한 언론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당시 법무법인 대륙아주 대표변호사로 황 전 총리를 대리하기도 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