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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남준을 만나다]자정부터 시작된 창작고통…아방가르드 TV가 꺼졌다

<26>천재,쓰러지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등 전성기 무렵

자정~새벽5시까지의 고된 작업패턴에

뉴욕 스튜디오서 뇌졸중으로 고꾸라져

부인 구보다·조수가 발견해 병원으로

김홍희 큐레이터가 백남준의 뉴욕 집을 방문해 함께 외출 중이다. 백남준은 1996년 4월 9일 뉴욕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사진제공=천호선




1995년 제5회 호암상 예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백남준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사진제공=호암재단


자신의 작품 앞에서 사인을 해 주고 있는 백남준. /사진제공=이정성




“아방가르드(Avant-garde·혁신적 경향의 전위예술)는 마르셀 뒤샹이나 존 케이지처럼 여든 이상은 살아야 빛을 볼 수 있어. 그래서 나도 80살까지는 살아야 해.”

백남준은 환갑을 앞둔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 비디오때·비디오땅’ 전시를 위해 서울에 머물던 중 존 케이지(1912~1992)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케이지는 음악의 영역을 확장시킨 전위적 현대음악가로, 백남준이 ‘스승’으로 꼽는 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독일로 간 백남준이 행위예술가이자 미술가로 전향한 계기가 바로 케이지와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1958년 독일의 음악도시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 여름 축제에 참석해 케이지를 만났다. 침묵과 소음까지 음악으로 끌어들이며 기존 예술의 범위를 뒤집어 놓은 케이지에게서 백남준은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음악을 소재로 하되 악기를 부수고 광란적인 행위 음악을 펼치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바이올린을 아주 천천히 들어올린 다음 순식간에 내리쳐 부수는 1962년의 ‘바이올린 독주(One for Violin)’가 대표적이다. 백남준은 훗날 ‘두 스승’(1991년)이라는 작품을 제작하면서 한국의 음악선생 신재덕과 케이지를 나란히 놓았다.

백남준은 곧잘 “오래 살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이 잦아질 무렵 백남준은 인생의 전성기를 질주하고 있었다. 유럽순회전과 고국에서의 회고전에 이어 1993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고 대전엑스포 재생조형관 전시에 참가했으며 미국·일본 등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립과 광주비엔날레 창설을 이끌었다. 3~4년 동안 남들 30~40년의 업적을 쌓았다.

그간의 공적으로 1995년 호암재단이 수여하는 제5회 ‘호암상’ 예술부문 수상자가 됐다. 이듬해 3월 23일 시상식이 열렸고 25일에는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국제학술대회가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다. 백남준 작품의 전문가로 꼽히는 존 핸하르트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를 비롯해 프랑스 미술평론가 장 폴 파르지에, 독일 미술사가 에디스 데커 필립, 일본 미술평론가 이토 준지가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중심으로 ‘하이테크놀로지 예술의 전망’을 강연했다.

바쁘고도 즐거운 나날이었다. 한국에 온 김에 1998년 국회 개원 50주년을 앞두고 기획 중이던 국회상징조형물 설치사업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당시 국회사무처에 근무하던 문화예술행정 전문가 천호선이 백남준과 국회 광장을 둘러봤다. 국회를 나서며 백남준은 “인체 DNA를 비디오 조각으로 만들어봐야겠다”고 구상안을 얘기했다.

천호선은 출국 전날 백남준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백남준은 비빔밥을 좋아했으며 종종 특유의 ‘비빔밥론’을 설파했다. 그는 학문과 예술분야의 다원화를 내다보며 “비빔밥의 본질은 비빔밥은 비빔밥이라도, 그것은 콩나물도 숙주나물도 표고도 시금치도 고비나물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고 비유했고 “모든 감각을 동원한 비빔밥 예술”을 주장했다. 그날 저녁 백남준은 유난히 과식하는 듯했다. 천호선은 “비빔밥을 허겁지겁 세 그릇이나 비우시는 것을 보고 건강상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백남준 지인들 등 삼성에 긴급 도움 요청

李회장 부부 “어떻게든 살려라” 총력지원

투혼 끝에 왼쪽 마비 휠체어 신세됐지만

“쓰러진 날이 부활절…좋아질거야” 털털



그렇게 뉴욕으로 돌아간 지 사흘째 날인 4월 9일, 책상에 앉아있던 백남준이 꼬꾸라지듯 쓰러졌다. 뇌졸중이다. 집에는 부인 구보다 시게코뿐이었다. 구보다가 위층에 사는 스튜디오 조수 존 매카바시에게 전화를 했다. 병원으로 옮기며 이정성에게도 연락했다. 마침 한국인 엔지니어 이정성은 구겐하임미술관 전시를 위한 설치작품 ‘메가트론(Megatrone)’ 제작을 위해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새벽녘에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뛰어가며 이정성은 백남준의 고된 작업패턴을 원망했다. 백남준은 자정 이후 새벽 5시 무렵까지 세상이 잠든 조용한 때를 자신만의 작업 구상시간으로 삼았다. 보통 5시 넘어 잠을 청해 오전 11시쯤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게 백남준의 일상이었다. 그날도 백남준은 찾아오는 이 없는 고요한 새벽 시간에 비디오편집을 하다 쓰러진 것이었다. 이정성은 “‘나 죽어, 병원으로 와’라는 목소리를 꿈결에 들은 듯 비몽사몽 간에 달려갔다”고 회고한다.

뉴욕대 메디컬센터에 도착한 이정성은 붉은 벽돌이 에워싼 복도 맨 끝방에서 백남준을 찾아냈다. 백남준의 눈이 시뻘게졌다.

“나 빨리 퇴원시켜. 나 발이 안 움직여. 손도 안 움직여. 한의사한테 전화해.”

익히 알다시피 백남준은 폐소공포가 있어 막힌 공간은 질색이다. 이정성은 “창문 있는 병실로 옮겨달라”고 소리쳤다. 입원실 층을 바꿔 세 면이 모두 창문인 병실로 옮기자 환자가 다소 안정을 되찾았다. 백남준이 ‘한의사’를 찾은 것은 자신의 병이 어려서 본 적 있는 ‘중풍’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말도 잘 안 통하는 타국 땅에서 한의사를 찾아 치료받기란 막막한 일이었다. 말도 몸도 굳어가는 백남준이 한국의 누이에게 전화해 달라고 했다. 백남준의 누이가 중풍에 좋은 약이 있다고 했으나 한국과 일본에서 사용되고, 미국에서는 아직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이 나지 않아 구할 수 없는 약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이정성은 시차도 생각 않고 갤러리현대 박명자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다가 “백남준이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은 박명자도 속이 타 들어갔다.

“누님이 말씀해주신 중풍 약이 한국이나 일본에는 있다는데 미국에는 없대요. 약 좀 구해주세요. 홍라희 여사님께 삼성병원에는 약이 있지 않나 물어봐 주시면 안될까요? 약 좀 보내주세요.”

이정성이 울면서 말했다. 앞뒤 재고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박명자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홍라희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으로 백남준과는 1984년 봄 파리의 김창열 화백의 집에서 만난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저녁 초대에는 훗날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된 홍라희와 박명자 외에도 원화랑 정기용 대표와 화가 정상화 내외가 함께 했다. 그 만남 이후 백남준은 일제 소니 TV 대신 삼성전자 TV모니터를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1987년에는 홍 관장의 주선으로 신라호텔에서 백남준과 이건희 회장이 처음 대면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헐렁한 흰 셔츠에 멜빵을 매고, 중국제 찍찍이 신발을 신고 백남준이 나타났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나간 그는 화려한 넥타이를 매고 다시 등장했다. 이건희 회장 내외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우리나라 경제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라 넥타이를 매지 않을 수 없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자 이 회장이 “그러면 우리 모두 넥타이를 풀자”고 화답해 부드러운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날의 속깊은 대화를 계기로 백남준은 삼성전자의 공식 후원을 받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 등 대형 작품 제작이 수월했다. 이정성은 백남준과 이건희 부부의 인간적 우정을 알았기에 간곡히 부탁했다.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비디오 때 비디오 땅’ 개막식에서 퍼포먼스 중인 백남준. /사진제공=이정성


박명자 사장이 연락을 취했다. 이 회장 부부는 국제올림픽위원회를 앞두고 LA에 머물고 있었다. 멀리에 있었으나 “어떻게든 백남준을 살려내야 한다”며 즉시 조치를 취했다. 삼성병원에서 약을 구했고 삼성그룹 계열사 전체에 회람을 돌려 맨 먼저 뉴욕으로 가는 사람 편에 약을 보내달라고, 백남준의 전속화랑인 홀리 솔로몬 갤러리로 찾아가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이정성은 홀리 솔로몬 갤러리에 앉아 있었다. 11시에 한국식당이 문을 열면 따뜻한 밥과 된장찌개를 포장해 병원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삼성 뉴욕지사 직원들이 찾아왔다. 함께 병원으로 갔다. ‘어떻게 하루 만에 약을 구해 올 수 있느냐’며 의료진도 놀랐다. 그들은 의사에게 “지금부터 백남준의 치료는 삼성이 책임질테니 어떻게든, 반드시 백남준을 살려내야 한다”면서 “매일 직원 2명씩 상주하며 모든 것을 돕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구보다 여사가 그들을 쫓아버렸다. 경계심이었다. 무리한 한국에서의 일정 때문에 몸에 탈이 났다며 트집까지 잡았다. 구보다는 한국에서 지어온 한약을 ‘허약한 남준이 마시기에는 너무도 쓴 플라스틱 주머니에 든 물약’이라며 모조리 버렸다. 하지만 백곰의 쓸개, 임신한 물개 배꼽, 거북의 연한 등껍질 등을 일본에서 공수해 먹였다. 한국으로부터의 지원을 끊어낸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다행히도 백남준은 서서히 회복해 가고 있었다.

“내가 쓰러진 날이 예수가 되살아 난 부활절이니까 난 틀림없이 좋아질 거야.”

몸의 왼쪽은 마비됐고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지만 백남준은 웃으며 말했다. 러스크 재활의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으며 백남준은 ‘제2의 전성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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