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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스펙과 프로필’ 감옥에서 탈출하기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현대사회

온갖 자격증 따기 위해 고군분투

하루 한번쯤은 하늘 올려다보며

지친 '나' 잠시 놓아주는 시간 갖길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은 상처가 별로 없어 보여요. 모범생으로 살아오셨잖아요. 도대체 무슨 상처가 있으신가요”.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때로는 그런 질문 자체가 또 다른 상처가 되기도 한다. 겉으로 볼 때 모범생이라면, 프로필이나 스펙이 괜찮아 보인다면, ‘상처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집단무의식이 작용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프로필이나 스펙이 얼마나 개인을 설명하는 데 무력한 것인지, 나를 소개하는 순간에 직면할 때마다 절감한다. 소개는 간단할수록 좋다. 나는 그저 ‘작가 정여울입니다’라는 소개로 만족하고 싶다. 프로필이 화려할수록, 소개가 구구절절 이어질수록, 우리는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려는 욕구를 숨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있는 상처가, 나라고 왜 없겠는가. 상처는 특정한 사건 때문만이 아니라 개인의 기질 때문에 더 자주 발생하기도 한다. 나처럼 예민한 사람들은 매일매일 수없이 상처받고, 매일 홀로 자신의 상처를 꿰맨다. 스스로 상처를 꿰매는 모습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이게 다 네가 예민해서 그런 거야’라는 또 한 번의 낙인찍기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토록 화려한 스펙과 프로필로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하는 현대사회를 직접 목격했다면, 가장 깊은 충격을 받았을 만한 작가가 바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산책자’나 ‘자연탐구자’라고 생각했다.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런 꾸밈없는 진심이었다. 사람들은 ‘그게 무슨 직업이냐’고 푸념하겠지만, 그는 그런 야박한 타인의 시선에 진심으로 개의치 않았다. 내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순수한 자기집중의 에너지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그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소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직업은 어떤 직장과도 관련 없는 오롯한 자기만의 세계, 즉 산책자나 자연탐구자였다.

나는 헨리 솔트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책을 읽다가, 소로가 하버드대 재학시절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 시절, 소로는 갇혀 있는 영혼이었다. 소로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나 선망하는 그 대학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자연을 탐구하고, 마음껏 숲길을 걸으며, 오직 자기 자신과 자연과의 대화에만 집중하는 삶임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려한 프로필과 커리어를 쌓기 위해 온갖 시험에 파묻혀 지내고 온갖 자격증을 따기 위해 분투하는 하버드생의 삶은 그에게 행복을 주지 못했다. 그는 어린 시절 형과 함께 강과 숲을 누비며 야영하던 추억, 하염없이 홀로 콩코드의 숲길을 걸으며 야생화의 개화시기를 치밀하게 점검하던 시간 속에 자신의 눈부신 자유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화려한 대학생활이라는 성채 안에 갇혀 있는 시간을 통해 깨어있는 시간, 해방된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나는 요새 소로처럼 자연과 대화하는 고독의 시간을 꿈꾸며 하루 한 번 이상 ‘하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날마다 달의 모양이 바뀌어 가는 밤하늘, 시시각각 빛깔과 형태를 바꾸어가는 구름을 품어 안은 대낮의 하늘을 관찰하는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 이 ‘하늘바라기’의 시간은 온갖 감정노동과 강박적 자기관리의 언어 속에 지쳐버린 나의 스트레스를 가만히 놓아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것만큼이나 위대한 예술은 바로 ‘삶 그 자체’를 예술로 만드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믿는다. 나는 나의 결과물이나 성취가 아니라 나의 일상 자체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내 인생이라는 소중한 질료를 찰흙처럼 곱게 빚고 매만져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만들고 싶다. 살아간다는 일, 숨을 쉰다는 일, 언어를 빚고 언어를 들으며 살아가는 이 삶을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스펙과 프로필’을 쌓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는 사회생활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이 순간’을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만들고 싶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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