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통상실적을 내보이기 위해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을 겨냥해 다양한 통상 칼날을 들이댈 가능성이 크다. 사문화됐던 무역확장법 232조를 꺼내 들어 수입산 제품에 무차별적으로 관세를 책정하려는 행태에서 이 같은 의중을 읽을 수 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놓고 한미 관계에 파열음이 커지는 가운데 미국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비상식적인 조치들을 동원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 정부 들어 전통적 우방의 개념이 상당히 약화됐다”며 “내년 대선을 고려해서 성과를 내보이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이 가진 카드를 확실하게 이용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경제 보복을 위한 다양한 수단을 이미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게 미국의 ‘불리한 가용 정보(AFA·Adverse Facts Available)’다. 미국은 조사 대상 기업이 조사에 비협조적이라고 판단할 경우 상무부가 해당 기업에 불리한 추론으로 징벌적 관세를 매길 수 있는 AFA 조항을 활용하고 있다. 실제 미국이 한국산 변압기와 주요 철강 제품 등에 고율의 덤핑·상계관세를 부과할 때마다 AFA가 인용됐다.
안보를 이유로 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무역확장법 232조는 파괴력이 더 크다. 미국은 이를 활용해 수입산 철강재에 25% 관세를 매긴 데이어 자동차 부문에도 적용하겠다며 각국을 어르고 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은 당장 국가안보를 이유로 자동차에 232조를 적용하겠다는 입장인데 향후 반도체나 조선 산업에 대한 무역확장법 232조의 적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실제 시행 여부를 떠나 언급 자체만으로 국내 관련 기업들의 활동을 소극적으로 제한한다”고 말했다.
통상 전문가들은 미국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같은 수단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한국과 미국이 주요 정치·외교적 현안을 두고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미국은 지소미아가 한미일 안보 공조의 ‘핵심축’임을 강조하면서 정부의 종료 방침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일본의 태도 변화 없이 지소미아 연장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지소미아 정부까지 일주일 여를 남겨둔 가운데 종료 시한이 다가올수록 미국의 압박 강도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방위비 협상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지소미아로 인한 불협화음까지 겪고 있는 상황”이라며 “갈등이 커질수록 피해가 경제계 쪽으로 미칠 수 있다”고 봤다.
양국이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지소미아가 파기될 경우 미국의 공세가 예상되지만 정작 이를 막을 카드는 제한적이다. 특히 전 세계 무역마찰을 중재하던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 해결기능마저 완전 마비될 위기에 처했다. WTO의 무역분쟁 해결 최종심의 상소기구 위원 3명 중 2명의 임기가 다음 달 10일 만료되기 때문이다. WTO 상소기구는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무역분쟁을 조정하려면 최소 3명 이상의 위원이 필요하다. 현재 상소위원 중 4명은 임기가 만료됐으며 다음 달 추가로 2명이 퇴임하면 상소기구는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WTO가 개점휴업 상태가 되면 미국이 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특정 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매겨도 제동을 걸기 어렵다. WTO 분쟁 해결 절차 중 패널(1심)에서 패소하더라도 미국이 상소 절차를 밟으면 담당 재판부가 없는 만큼 사건은 ‘영구미제’로 남게 된다.
/세종=김우보·황정원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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