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골목. 먹다 남은 도시락, 빈 음료수병이 가득한 승용차에서 ‘서현우 탐정사무소’ 소속 탐정인 서현우(가명)씨와 김재훈(가명)씨가 카메라를 들고 주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80억대 금융사기범을 잡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잠복근무를 하던 중이다. 이들은 그동안 ‘민간조사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왔지만 5일부터 정식 ‘탐정’으로 업무를 볼 수 있게 된다. 서씨는 “다단계 사기범 우두머리를 잡기 위해 4개월째 잠복을 하고 있다”며 “경찰처럼 폐쇄회로(CC)TV를 볼 수 없지만 사기범들의 걸음걸이·차림새·동선을 모두 꿰고 있어 놓칠 일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탐정’으로 영리활동 가능…한국판 셜록 첫 단추 끼우다=서씨와 김씨가 정식으로 탐정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올 2월 국회가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며 ‘탐정 명칭 사용 금지’ 조항을 삭제한 덕분이다. 이제 탐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탐정사무소 개업이 가능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모두 탐정 제도가 마련된 가운데 한국도 뒤늦게 탐정업의 첫발을 뗀 셈이다.
탐정이라는 명칭은 이제 허용됐지만 업무 자체는 새롭지 않다. 민간조사원 자격으로 교통사고·보험사기·산업스파이 등 다양한 사건을 맡아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경찰이나 검찰과 달리 강제 수사 권한은 없지만 현장을 뛰며 직접 정보를 모은다. 이렇게 모은 정보는 수사 과정에서 증거로 쓰인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6월 현재 탐정 관련 자격증 기관만 27개다. 4곳은 민간자격증을 직접 발급하며 탐정을 양성하고 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탐정은 약 8,000명으로 알려졌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공인탐정제도 도입해야=이번 법 개정으로 가출 청소년 소재 파악 등 업무 영역이 넓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민·형사상 증거를 수집하거나 개인정보 무단 수집 등은 여전히 불법이다. 수사·재판 중인 사건의 증거를 수집하면 ‘변호사법’, 도주 중인 범법자나 가출한 성인의 소재 확인은 ‘개인정보보호법’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 경찰 관계자는 “증거능력이 있는지 다퉈봐야 한다”며 “사안이 복잡해 증거로 인정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탐정들은 셀카로 목표 대상을 사진에 같이 담거나 투자자로 접근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럼에도 합법과 불법의 영역이 불명확하다. 탐정업계에서 ‘공인탐정제도’ 도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유우종 한국민간조사중앙회장은 “타인의 차에 위치 추적기를 다는 것은 불법인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종종 있다”며 “민간 자격증이다 보니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애매모호하다”고 말했다.
◇경찰, 탐정 명칭 사용 업체 등 불법행위 단속 방침=정부도 부처 간 협의를 거쳐 공인탐정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2005년 17대 국회부터 이번 21대 국회까지 공인탐정법(민간조사업법)에 대한 발의가 이어지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탐정업 시대가 열린 만큼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하반기 중으로 탐정 명칭을 사용하는 업체 및 심부름센터·흥신소, 민간자격증 발급 단체를 대상으로 지도·감독과 특별단속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민구·심기문기자 1min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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