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 대로변에 미술작품이 걸렸다. '화랑가 1번지'로 꼽히는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 앞이다.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든 차로 지나치는 사람이든 누구나 작품을 볼 수 있으니,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때문에 실내 관람을 최소한으로 자제하는 요즘 분위기에 꿀맛 같다. 지난해 개관 50주년을 맞은 갤러리현대가 건물 외벽의 8.26x5.6m 크기 대형 빌보드를 외부 전시 용도로 활용하고자 올해부터 새롭게 시작한 '아트 빌보드 프로젝트'다.
첫 선을 보인 작품은 사진 작가 이명호의 '유산 #3 서장대'. 이명호 작가는 지난 2004년부터 시작한 '사진-행위 프로젝트'로 국내외에 이름을 알렸다. 찍고자 하는 피사체 뒤에 하얀 캔버스를 설치해 촬영한 '나무'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nothing, But)' 등이 대표작이다. 자연 속 나무의 뒤, 광활한 사막과 바닷가에 뜬금없이 등장한 캔버스는 초현실적이지만, 이를 통해 대상을 자연의 맥락에서 분리하고 이차원적 평면 이미지로 바꿔 놓는다. 미술적 행위를 상징하는 캔버스 덕분에 평범한 피사체는 '주목할 만한 대상'으로 재해석되고, 하얀 배경 속에 세세한 매력을 더 잘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장 폴 게티 센터, 에르메스 재단, 암스테르담 사진 미술관, 호주 빅토리아 내셔널 갤러리 등에 소장돼 있다.
지금 삼청로 길 가에 전시 중인 '서장대'는 수원화성의 서장대를 흰 캔버스 배경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수원화성 행궁 맞은편 봉긋하게 솟은 팔달산 산봉우리에 위치한 서장대는 화성에 주둔한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수원화성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설계됐다. 이 작가는 2014년 세계미술평론가협회(AICA) 총회의 수원 개최를 기념해 작업을 의뢰 받았다. 당시 서장대의 건축적 아름다움과 역사적 의미, 문화유산으로서 지닌 가치에 특별히 주목했던 작가는 이를 기점으로 인공물인 문화유산을 작업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 계기로 작가는 2018년부터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광주 충효동의 왕버들군락, 인천 백령도의 몽돌해변, 화성의 우음도, 충남 부여군 동남리의 정림사지, 전북 익산시 왕궁리의 백제 궁터 등 시대와 용도, 그 의미가 다른 다양한 문화재에 관해 작업하고 있다. 문화유산을 촬영한 작품들은 내년께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이명호 개인전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 '아트 빌보드 프로젝트’에 대해 갤러리현대 측은 "그간 전시 홍보를 위해 활용하던 건물 외벽을 ‘갤러리 밖의 갤러리’로 변신시킨 것"이라며 "이곳에서 갤러리현대가 소개하는 작가들의 대표작과 빌보드 자체를 매체로 삼는 새로운 작품을 잇달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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