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일본 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부품 소재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했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포토레지스트와 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가 규제 대상이었다. 한국은 1년도 안 돼 수입처 다변화와 국내 기업의 기술 개발에 성공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꿔 놓았다.
문제는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진 배경에 산업화 양산 기술의 중요도에 대한 인식 부족과 태만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소재는 이미 30년 전 국내에서 개발이 완료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소량 개발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즉, 기술력 자체보다 산업화 양산 기술 차이가 국가 간 반도체 재료 산업의 경쟁력을 가른 것이다.
카이스트 김정호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는 책 '공학의 미래'에서 한국 공학의 경쟁력 부족이 잘못된 정부 정책 뿐 아니라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논문 등재 중심의 학계 풍토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SCI 논문 등재만을 연구 목표로 삼을 경우 연구 결과물을 양산해내기 어렵고, 실제 기업이 필요로 하지 않는 연구에 매달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공학 발전에 필요한 것은 '공학적 도그마'에서 벗어나 보다 융합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갖추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저자는 4차 산업혁명이 아직 본격화하지 않고 코로나 사태로 전환점을 맞은 지금이야말로 한국 과학기술계가 근본적인 혁신을 통해 ‘퍼스트 무버(First Mover·시장 선도자)’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적기라고 전망했다. 오늘날 세계는 새로운 기술 사회의 변곡점에 직면해 있는데, 한국 공학이 중심이 돼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그러면서 실업·빈곤·교육 격차·디지털 격차·고령화 등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로 꼽았다.
그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을 중심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공학에 위기인 동시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것으로 내다봤다. 단순 개선을 위한 기술 개발에만 몰두한다면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망이 향하는 방향을 제대로 간파한 기술이야말로 살아있는 공학의 청사진이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수학, 인간의 마음을 읽는 인문학, 영역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융합의 기술을 필수로 제시했다.
김 교수는 "진짜 4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기초 시스템이 탄탄할 때 더욱 견고하게 완성될 것"이라며 "거기에는 인문, 사회, 정치, 과학, 기술, 문화, 교육 등 모든 면이 포함된다. 과학기술계는 그 과제의 상당 부분을 떠안아야 한다"고 밝혔다. 1만7,000원.
/최성욱 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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