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성추행 사건 전후 피해자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피해자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은 하급심 판단에 문제가 있다며 재판을 다시 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70)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에 돌려보냈다고 18일 밝혔다.
A씨는 채팅앱으로 만난 피해자 B(30)씨를 모텔로 데려가 50만원을 가방에 넣어준 뒤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합의에 의한 신체접촉만 있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1심 법원은 B씨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인 점 등을 들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A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항소심 법원은 1심과 정반대의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B씨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사건 발생 전후 B씨의 태도가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B씨가 모텔에 가기를 거부하지 않았고, 사건 이후에도 A씨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항소심이 "잘못된 통념에 따라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상정해 두고 이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 진술의 합리성을 부정했다"며 "논리와 경험칙에 따른 증거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진 가해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뿐 아니라, 가해자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피해자가 일정 수준의 신체접촉을 용인했더라도 그 범위를 넘어서는 신체접촉을 거부할 수 있으며, 피해 상황에서 명확한 판단이나 즉각적인 대응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가 다양한 대처 양상을 보이는 만큼 진술의 신빙성은 구체적인 상황에 기초해 판단해야 하고, 이러한 기준에 따라 B씨 진술의 신빙성은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성폭력 범죄의 특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피해자의 특정 반응들이 통상적일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설시해 성폭력 사건에서의 경험칙을 제시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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