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기관 자동차와 비교했을 때 전기자동차가 친환경적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는 치명적인 환경오염을 유발할 수 있는 화학물질 덩어리로 꼽힌다. 이른바 친환경 전기차의 역설이다. 국립환경과학원은 전기차 폐배터리를 산화코발트·리튬·망간·니켈 등을 1% 이상 함유한 유독 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끄기가 쉽지 않아 소각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폐배터리 양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2030년 전기차 누적 보급 대수는 300만 대, 전기차 폐배터리 발생량은 10만 7500개로 추산된다. 환경부가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이 2011년이었다. 전기차 배터리 수명(10년)을 고려하면 이미 올해부터 폐배터리는 쏟아지고 있다.
특히 ‘탄소 없는 섬’을 표방한 제주도는 더욱 시간이 없다. 현재 제주도 도로 위를 달리는 전기차는 3만 대로 전국 최고 수준이다. 이는 곧 앞으로 폐기될 배터리 수도 가장 많을 것임을 의미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기차 배터리는 폐차 후 지방자치단체에 반납하게 돼 있었다. 이에 따라 2030년 제주도가 처리해야 할 폐배터리는 2만 개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진정한 탄소 중립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전기차 도입만큼 폐배터리에 대한 대비가 필수적인 상황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주도는 사용 후 배터리를 수집하고 재사용(재제조)하는 전기차배터리산업화센터를 세웠다.
이달 14일 찾은 제주시 아라동 전기차배터리산업화센터에는 전기차에서 떼어낸 폐배터리가 가득 쌓여 있었다. 지난달 말 기준 회수된 전기차 배터리는 300여 개에 달한다. 회수된 배터리는 얼마나 더 쓸 수 있는지 성능 평가를 하게 된다. 먼저 배터리팩 하나당 약 48시간의 충·방전 검사를 수행해 남은 용량에 따라 A~E 등 5단계로 나눈다. 팩을 다시 모듈 단위로 분해해 24시간 동안 성능 검사를 실시하고 모듈의 용량 단위에 따라 5등급으로 재분류한다. 최종적으로 잔존 용량이 70% 이상인 배터리는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다양한 용도로 재사용된다. 잔존 용량이 그 이하인 배터리는 모듈에서 원재료를 추출해 재활용할 수 있는데 경제성과 환경오염 우려 등으로 센터에서 진행하고 있지는 않다. 김형진 성능평가팀장은 “재활용이 가능한 배터리도 폐기하지 않고 재활용 전문 민간기업에 매각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전기차 배터리를 가장 효율적으로 재사용하는 방법은 신재생에너지와 연계된 ESS를 만드는 것이다. 회수한 배터리의 환경문제는 물론 신재생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ESS로 재사용되는 배터리는 전기차에서 떼어낸 후 10년 이상 더 쓸 수 있다. 센터에서도 전기차에서 회수한 배터리를 재사용한 ESS를 태양광발전소와 연계한 실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르노코리아의 ‘SM3’에서 나온 폐배터리 8개 반을 모아 만든 소형 ESS로 센터 주차장에서 생산한 태양광 전력을 저장해 바로 옆 전기차 충전기에 전력을 공급한다. 김 팀장은 “ESS를 이용해 방전된 SM3 8대를 충전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센터는 폐배터리로 만든 ESS를 전기차 충전소뿐만 아니라 가로등, 감귤 운반차, 오토바이 등에 적용하는 8건의 실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폐배터리 재사용은 아직 실증 단계에 그치고 있다. 폐배터리의 재사용 여부나 안전성, 잔여 성능을 판단할 기준이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탓이다. 다행히 정부는 최근 전기차 폐배터리 시장 확대에 대비해 규제 손질에 나섰다. 폐기물로 규정되던 전기차 폐배터리를 순환자원으로 인정하고 재사용·재활용을 권장한다는 방침이다. 1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안전성 기준 등을 마련하고 내년 10월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김 팀장은 “인증 체계가 표준화되면 이를 상용화하고 기업이 부가가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데이터 등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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