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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를 R&D답게"…상대평가 전면도입, 하위 20% 사업은 정리

[33년만의 R&D예산 감축]

◆ 기획부터 평가까지 대전환

기초연구·출연연 예산 5000억↓

전략기술 투자는 6.3% 늘려 5조

이종호 "비효율 걷어내는 과정"

과기계 "기술패권 뒤처질 수도"

윤석열 대통령이 6월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정부 연구개발(R&D)이 이권 카르텔에 의해 나눠먹기식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질타하며 예산 재검토를 지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유수의 대학교수들이 국립과학재단(NSF)에 연간 10건가량의 연구 과제를 신청해도 한 건이 될까 말까 합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의 한 단장)

이처럼 미국·유럽 등에서는 연구자가 정부 부처나 연구 지원 기관 등으로부터 연구개발(R&D) 과제를 수주하는 것이 무척 까다롭다. 대신 지원을 받게 되면 연구자는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받고 독창적 연구에 도전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교수와 정부출연연구원 연구자, 기업 연구소들이 R&D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여건은 낫지만 자율성이 떨어진다.

문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예산 비중이 이스라엘과 세계 1·2위를 다투지만 선도 연구와 기술사업화에 나서는 생태계는 부족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패스트팔로어’에서 ‘퍼스트무버’로 전환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벤처·스타트업들이 브로커를 통해 연구 과제를 수주하는 등 나눠먹기식 보조금 성격의 R&D 예산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10년 넘게 ‘코리아 R&D 패러독스’가 지적돼왔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R&D 예산 구조 조정의 칼을 빼 들었다. 과학기술계의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년 정부의 R&D 예산을 27조 원 선(기획재정부의 일반 R&D 예산 미공개로 인한 추정치)으로 올해(31조 778억 원)보다 무려 4조 원가량 감축하기로 했다. 이는 1991년 정부 R&D 예산(8241억 원)이 전년에 비해 10.5% 축소된 뒤 3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2016년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관장하는 주요 R&D 예산이 전년보다 줄어든 적은 있으나 전체 정부 R&D 예산은 증가했다.



정부는 앞으로 R&D 분야에도 시장 논리를 적용해 성과가 부진한 하위 20% 사업에 대해서는 과감히 구조 조정하기로 했다. 결국 과학기술 예산 증가의 불패 신화를 깨뜨리고 연구 과제의 기획·선정·집행·평가에서 페러다임 대전환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당장 1200여 개의 R&D 사업 중 나눠주기식 카르텔 성격이 있거나 유사·중복됐다고 판단되는 사업 등을 중심으로 108개를 통폐합하기로 했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특정 그룹이 나눠먹기식으로 가져가거나 기획 단계에서 유리하게 만드는 등 카르텔적 요소가 있는 사업이 있다”며 “R&D다운 R&D를 해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도 “상대평가를 전면 도입해 하위 20% 사업은 구조 조정할 것”이라며 “연구 현장에서 과도하게 늘어난 연구 수당 등을 합리적으로 축소하고 간접비도 관리를 강화할 것”이라고 거들었다.

정부의 급격한 예산 감축은 R&D 예산을 10조 원가량 늘린 전임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하려는 측면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올 상반기 국세·지방세 수입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0조 원, 6조 원 가까이 감소하는 등 정부 재정이 녹록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과학기술계에서는 비효율성 제거라는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글로벌 기술 패권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인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특히 내년 기초연구 예산이 올해(2조 6000억 원)보다 2000억 원 감소하는 점에 아쉬움을 나타낸다. 국가전략기술을 연구하는 출연연의 연구 예산도 올해(2조 4000억 원)보다 3000억 원 줄어든다. 과학기술인의 실질소득이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익명을 원한 한 출연연 원장은 “내년에는 연구 과제도 줄이고 비상 체제로 조직을 운영할 수밖에 없다”며 “연구원들이 인건비를 벌충하기 위해 연구 과제를 수주하는 데 내몰려 본연의 임무에 소홀하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외려 심화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하소연했다. KAIST의 한 교수도 “경쟁 체제의 기초연구 예산이 왜 카르텔인지 모르겠다”며 기초연구 예산과 과학기술특성화대 예산이 모두 감축될 예정이어서 연구실에서 불요불급한 예산을 줄이고 긴축 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에 정부는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투자 확대 기조는 유지하고 국제 공동 연구 투자는 폭증 수준으로 평가할 정도로 대폭 늘릴 방침이다. 우선 12대 국가전략기술은 올해(4조 7000억 원)보다 6.3% 증가한 5조 원으로 하되 첨단바이오(16.1%), 사이버보안(14.5%), 양자(20.1%), 2차전지(19.7%), 우주(11.5%) 등 7대 분야를 더 늘리기로 했다. 이와 함께 국방, 안전, 탄소 중립 등 국가 임무 수행을 위한 필수 R&D에도 8조 7000억 원을 쏟아부을 방침이다.

이 장관은 “늘어나는 예산 속에서 오히려 안일함과 기득권이 자랐다”면서 “예산을 늘리는 것은 쉬운 길이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길”이라며 낡은 R&D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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