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밍업 랩’에서 바퀴를 달군 60여 대의 레이싱카가 트랙 저편에서 헤드라이트를 밝힌 채 모습을 드러냈다. 긴장감이 감도는 수 초간의 정적. 프랑스 ‘르망 24시’ 경기장에 모여든 수만 명의 관중들이 숨을 죽이고 서서히 기립하기 시작했다. 레이싱카가 출발선을 통과하는 순간, 찢어질 듯한 배기음이 트랙을 갈랐다. 발치까지 닿는 엔진의 격렬한 진동에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수십 개의 에어혼 소리가 동시에 울렸고, 형형색색의 각국 깃발이 거세게 펄럭였다. 24시에 고정돼 있던 전광판 시계도 23시 59분 59초를 가리키며 지구 상에서 가장 질긴 레이스의 시작을 알렸다.
'끝판왕' 레이싱 경기에 인산인해
세계 3대 레이스 중 하나인 ‘르망 24시’가 14일(현지 시간) 프랑스 르망에서 개막했다. 르망 24시는 24시간 동안 세 명의 드라이버가 번갈아 13.626㎞ 길이의 ‘라 사르트 서킷’을 쉬지 않고 반복 주행하며 ‘누가 더 멀리 달리는지’를 겨루는 경기다. 르망 24시의 첫 경기가 시작된 1923년 이래 최고기록은 아우디 R15 TDI+ 팀이 2010년 세운 5410.713㎞(397랩)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8번 왕복하는 거리를 하루 만에 달린 것과 맞먹는다.
이날 경기장은 극한의 난이도에서 차량의 내구성과 성능은 물론 레이싱 주행 능력까지 검증하는 ‘테스트 베드’를 보기 위해 찾은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르망 관계자에 따르면 올해 모여든 관중 수는 33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르망 인구 15만여 명의 두 배 이상의 관중이 하루에 몰리는 셈이다. 이날 르망 24시 경기장을 찾은 한 관중은 “인류가 가진 최고의 기술력을 뽐내는 곳인 만큼 매년 방문하고 있다"며 “자동차의 날카로운 엔진소리가 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해 올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제네시스, 관심 한몸에…내년 ‘하이퍼카’ 본격 진출
현대차(005380)그룹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 레이싱카도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제네시스는 올해 현대차그룹 최초로 르망 24시에 출사표를 던졌다. 올해는 운영 파트너인 ‘아이덱 스포츠(IDEC Sport)와의 협업을 통해 르망 24시의 두 번째 클래스인 ’LMP2'에 참여하며, 이후 현재 개발 중인 ‘GMR-001 하이퍼카’를 완성해 내년 르망 24시의 최고 대회인 ‘하이퍼카 클래스’ 도전하는 것이 목표다. 제네시스는 최근 전설적인 레이서인 재키 익스를 레이싱 어드바이저로 영입했으며, 르망 24시 3회 우승 경력을 가진 안드레 로테러 레이서를 영입하기도 했다.
경기 시작 전 진행된 그리드워크(경기 전 서킷 내에서 레이싱카를 관람하는 행사)에서는 백여 명의 관중이 제네시스의 시그니처 컬러인 ‘마그마(Magma)’ 색상을 입은 레이싱카 주위에 모여들었다. 많은 팬들이 차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현대차그룹의 첫 르망 도전을 응원했다.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그룹 최고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와 시릴 아비테불 현대모터스포츠 법인장도 참석해 관중들과 인사를 나눴다.
차량을 점검하는 제네시스 피트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차고 뒤 오피스에서는 엔지니어가 차량 상태와 시스템을 확인했으며, 뒤쪽으로는 24시간 동안 갈아 끼울 56개의 타이어가 사람 키 높이 만큼 쌓여 있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GMR) 관계자는 “레이싱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선수 뿐 아니라 레이싱팀의 소통이 중요하다”며 “경기 중에 선수는 스티어링 휠에 나타나는 많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엔지니어와 무전으로 소통하며 차량을 조정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날 제네시스 차량은 경기 시작 14시간 만인 새벽 6시 10분경 주행을 멈췄다. 르망 24시 공식 SNS 채널에 따르면 오른쪽 뒷바퀴 문제로 인해 경기를 중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제네시스 측은 "올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개발한 차량을 통해 내년에는 하이퍼카 클래스에 본격적으로 도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포디움 영예는 페라리·포르쉐
올해 르망 24시의 왕좌는 AF 코르세 공식 팀 소속으로 경기에 출전한 페라리가 차지했다. 13.626㎞를 도는 데 걸린 최고 랩타임은 3분 26초. 2위는 미국의 모터스포츠 명문팀인 펜스키(Penske)와 손잡은 포르쉐였다. 3위는 또 다른 페라리 팀이 차지하며 다시 한번 르망의 전설임을 입증했다.
특히 페라리는 지난해에 이어 3년 연속 하이퍼카 클래스 정상에 오르며 르망 최정상 제조사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포르쉐는 LMDh 규격 차량으로 출전해 하이브리드 기술 경쟁에서 높은 완성도를 선보였으며, 경기 내내 선두권을 놓치지 않는 안정적인 레이스 운영으로 호평을 받았다.
르망 24시는 이제 단순한 레이스를 넘어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이 미래 모빌리티 기술을 시험하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기술 전쟁터’로 진화하고 있다. 내년엔 제네시스를 포함한 더 많은 제조사들이 하이퍼카 클래스에 도전장을 내면서 레이스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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