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HD현대중공업(329180)은 필리핀 해군 발주로 올해 3월 진수된 초계함 ‘디에고 실랑함’(2번함)을 필리핀에 공식 인도했다. 길이 118m, 폭 14.9m의 최신예 초계함인 이 함정은 HD현대(267250)중공업이 1974년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애틀랜틱 배런’호를 처음 세상에 내놓은 뒤 정확히 5000번째로 인도한 선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단일 조선사가 5000척을 고객에게 넘긴 사례는 조선 역사가 더 긴 일본·유럽에서도 유례없는 기록이다.
HD현대는 이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19일 울산 조선소에서 ‘선박 5000척 인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정기선 HD현대 회장을 비롯해 박동일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실장, 안병길 해양진흥공사 사장, 박정석 고려해운 회장 등이 참석했다.
모래 사장 사진과 조선소 설계 도면만 들고 만든 조선소
울산 HD현대중공업 조선소는 한국 조선업이 태동한 곳이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울산 미포만 모래사장 사진과 영국 조선소 설계 도면을 들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금을 확보해 만든 조선소다. 정 명예회장은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조선소 건설 및 선박 건조를 추진하며 차관을 얻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처음 만든 선박은 HD현대의 1호 인도선인 ‘애틀랜틱 배런’호다.
이날 기념행사를 HD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진행한 것도 HD현대와 한국 조선업이 탄생한 곳에서 다음에 누적될 새로운 5000척을 계속 만들어가겠다는 정 회장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정 회장은 기념식에서 “5000척은 대한민국 조선 산업의 자부심이자 세계 해양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도전의 역사”라며 “함께 만든 도전의 역사를 바탕으로 다음 5000척, 또 다른 반세기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HD현대가 선주들에게 넘긴 5000척 중 HD현대중공업이 절반이 넘는 2631척을 건조한 후 인도했다. 그리고 HD현대미포(010620)가 1570척, HD현대삼호는 799척을 선주들에게 넘겨줬는데 HD현대가 거래한 선주사만 68개국 700여 곳에 이른다. HD현대 관계자는 “선박의 길이를 평균 250m라고 가정하면 선박 5000척의 총길이는 1250㎞에 달한다”며 “이는 서울에서 일본 도쿄까지의 직선거리(1150㎞)보다 길며 일본과 유럽에서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이라고 말했다.
일본·유럽·중국 조선소도 달성 어려운 기록
업계에서도 유례없는 기록이면서 동시에 앞으로도 다른 조선사들이 달성하기 쉽지 않은 기록이라고 입을 모았다. 조선업 역사가 우리보다 훨씬 긴 유럽과 일본의 경우 5000척에 달하는 대량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사업 구조가 아닌 데다 배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한국 조선소들보다 훨씬 길다. 조선 업계 관계자는 “유럽은 발주가 많은 상선 중심이 아닌 크루즈나 특수선 중심으로 사업 구조가 바뀌었고, 일본은 역사는 길지만 부침이 심해서 오래된 조선소는 구조조정을 진행해 이미 문을 닫은 경우가 많아 단일 기업 또는 기업집단이 누적 건조량을 따라올 수 없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수주량은 많지만 수많은 조선소가 나눠 먹는 구조여서 단일 기업으로서 HD현대를 따라잡기는 당분간 쉽지 않다는 전망이다.
HD현대가 누적 인도 선박 5000척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조선 기술을 끊임없이 개선하면서 글로벌 시장 변화에 적극 대응해왔기 때문이다. 글로벌 조선 수요는 원유운반선에서 컨테이너선, 액화천연가스(LNG) 수송선, 친환경 선박 등으로 변화해왔는데 HD현대는 변화의 시기마다 시장의 선두에 있었다. 앞으로는 상선 못지않게 군함 발주도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HD현대는 군함 건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주요 군함·초계함 수출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5000번째 인도함이 초계함이라는 사실 역시 이 같은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HD현대 조선 3사 간의 선종별 전문화와 블록 공법으로 대표되는 표준화 건조 기술은 선박 대량생산을 뒷받침해 꾸준한 수주와 적기 인도를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다.
전·후방 산업에도 활력…한국 경제 이끈 조선업
아울러 HD현대가 5000척의 선박을 건조해 인도하면서 함께 성장한 한국 조선업은 전·후방산업에 활력을 넣으며 경제성장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다. 실제로 2021년 산업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초대형 유조선에는 약 3만 6000톤의 후판이 사용되며 2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에는 5만 톤에 달하는 후판이 사용된다. 최근 수요가 늘고 있는 LNG 운송선의 경우 극저온에 견딜 수 있는 소재가 필요한데 이는 철강 djq체들이 고망간강과 니켈강 등 특수강 개발에 나서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조선 업체의 한 핵심 관계자는 “배를 만드는 데 직접 쓰이는 철강뿐 아니라 엔진·기계·도료·통신 등 전방산업은 물론이고 해운·방산·물류 등 후방산업 역시 조선업이 커지면서 동반 성장해왔다”며 “조선업은 다른 제조업에 비해 생산 유발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3代째 이어진 정주영 '불도저 정신'
HD현대의 조선업 성공 신화는 500원짜리 지폐 1장으로 조선소 설립을 위한 차관을 얻어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로부터 3대째 이어져온 도전 정신에 기반한다. 1970년 당시 배 1척 건조해본 경험이 없는 한국이 외국자본으로부터 차관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정 창업주는 포기하지 않고 영국의 유력 인사인 찰스 롱보텀 회장을 찾아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한국은 이미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정 회장의 설득은 롱보텀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후 그의 도움을 받아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의 차관을 받아낸 정 창업주는 황무지였던 울산 미포 모래밭을 한국 최초의 조선소로 변모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은 정 창업주의 뒤를 이어 현대중공업이 조선업 암흑기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세계 1위 조선사로서 기틀을 닦는 작업에 몰두했다. 앞서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조선업이 최악의 업황을 견뎌내야 했던 1980년대에 정 이사장은 체질 개선을 위해 사업부별로 책임경영제를 도입하고 원가 절감의 고삐를 죄면서도 기술혁신을 위한 투자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HD현대중공업의 대표적인 고부가 수익원으로 자리 잡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기술 역시 이때 기틀을 잡았다.
마스가 엔진 단 정기선 '퀀텀점프' 시동
HD현대의 새 수장이 된 정기선 회장은 과감한 구조 재편을 통해 HD현대그룹의 주력인 조선업의 ‘퀀텀점프’를 모색하고 있다. 정 회장의 지휘 아래 HD현대는 국내를 넘어 필리핀·베트남 등지에 조선소를 설립하는 등 해외 영토 확장에 적극 나서고 있다. 다음 달에는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가 합병 법인으로 재탄생한다. 정 회장은 두 조선 계열사의 역량을 한데 모아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에 추진력을 더하고 나아가 미래 유망 산업인 함정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실제 HD현대는 함정 분야에서 국내 최다 수출 기록을 보유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축적해놓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총 106척의 함정을 건조 및 인도했으며 이 중 18척을 해외로 수출했다. 정 회장은 미국을 비롯한 해외 조선소 및 방산 업체와의 협력 강화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해 미 팰런티어와 무인 수상정 개발을 위한 파트너십을 체결한 데 이어 올 들어 미 안두릴과 무인 함정 설계 협력, 에디슨슈에스트와 컨테이너선 및 MR탱커 공동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
울산·전남 등 지역경제 활성화…베트남·필리핀 등 해외 입지 개척 지속
HD현대의 이 같은 성장은 본거지인 울산과 전라남도의 지역경제 활성화 역시 이끌고 있다. HD현대중공업 조선소가 자리 잡은 울산 동구의 제조업 종사자 3만 8200여 명 중 80%가 넘는 3만 2800여 명이 현재 조선·기자재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울산 전체 수출의 25~30%가 조선 및 해양 플랜트에 기반하고 있다.
HD현대삼호 조선소가 위치한 전남 영암의 경우 산업별 고용에서 ‘조선·기타운송 장비 제조업’이 부동의 1위를 차지한다. 특히 HD현대삼호의 지역 고용 파급력은 협력사를 포함해 약 2만 7000명에 달한다. HD현대 관계자는 “조선 3사의 성장에 따라 고용, 소비, 상권 회복 등 지역 경기 개선과 함께 중장기 산업 경쟁력 강화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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