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우에노에서 만난 은행원 미쓰이(35) 씨는 확정기여(DC)형 적립금으로 매달 5만 5000엔(약 52만 원)을 납입하고 있다. 미쓰이 씨는 연금 포트폴리오를 일본 주식 5%, 해외 주식 71%,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 24% 등 모두 위험자산으로 구성했다. 그는 “장기 성과가 예상되는 미국 주식에 무게를 뒀고 배당도 추구하기 위해 투자 대상을 분산시켰다”고 말했다. 일본 현지 전문가들과 일반 직장인들로부터 확인한 일본인들의 퇴직연금 투자 경향은 한국과 비교해 ‘위험자산, 장기 투자’ 선호가 두드러졌다.
20일 일본 금융청에 따르면 지난해 3월 말 기준 일본 DC형 퇴직연금 적립금 중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은 67.3%로 집계돼 처음으로 60%대를 돌파했다.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은 32.7%였다. 반면 한국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 DC형 내 실적배당형 23.3%, 원리금보장형 76.7%로 자산 비중이 일본과 정반대다. 수익률 차이는 극명하다. 일본의 DC형 연평균 투자수익률은 2001년 제도 도입 후 지난해 3월까지 6.9%다. 반면 2023년 기준 한국 DC형의 장기(10년) 평균 수익률은 연 2.53%였다.
"DC형으로 美·日 주식에 투자"…전용 펀드 '1조엔 클럽' 입성
‘예금바보(預金バカ)’. 일본인들의 오래된 현금·예금 선호 현상을 일컫는 단어지만 퇴직연금 분야에서만큼은 통하지 않는 말이 됐다. 전문가들은 장기 저성장 구조 속에서 노후 준비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국민적 위기의식이 높아진 데다 금융 상품 장기 투자의 중요성에 대해 약 20년간 지속된 일본 정부의 강도 높은 ‘리터러시(이해력)’ 향상 정책 등 복합적 요인이 맞물리며 일본인들의 퇴직연금에 대한 의식이 변화했다고 진단했다.
일본 운영 관리 기관 연락협의회에 따르면 근로자가 직접 운용을 지시하는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가입자 수는 올 3월 말 기준 862만 명으로 5년 전인 2020년 3월 말(723만 명) 대비 19.2% 늘었다. 내년에는 일본 DC형 가입자 수가 2018년을 정점으로 감소 추세로 전환한 확정급여형(DB) 가입자 수(올 3월 887만 명)를 추월할 것으로 전망된다. DC형 적립금은 올 3월 말 약 23조 7000억 엔으로 최근 5년간 74% 불어났다.
이는 자신의 퇴직연금을 위험자산에 투자하려는 일본 직장인들이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일본인들의 DC형 내 실적배당형 투자 비중은 2021년 54.8%, 2022년 57.9%, 2023년 59.8% 등으로 최근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으며 지난해 처음으로 60%대를 돌파했다.
실적배당형 상품의 투자 비중도 외국 주식 22.3%, 일본 주식 15.3%, 외국 채권 4%, 일본 채권 3.6%, 밸런스형 20% 등 고르게 배분됐다. 후생연금 보험료가 높아 DC형에는 매달 5000엔씩만 납입하고 있다는 16년 차 지방 공무원 안도 씨는 “미국 주식 인덱스펀드와 일본 주식 인덱스펀드에 절반씩 투자 중”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일본 DC 전용 펀드인 ‘노무라 외국주식인덱스펀드 MSCI-KOKUSAI’의 순자산 잔액이 올 7월 1조 엔을 돌파하기도 했다. DC 전용 펀드가 순자산 ‘1조 엔 클럽’에 입성한 최초 사례다. 해당 펀드는 미국 등 선진국 증시에 분산투자해 장기적 자산 성장을 추구하는 펀드다.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이었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경제가 장기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고 고령화까지 심각해진 탓이다. DC형 제도도 2001년 도입됐다. 한국의 기초연금과 비슷한 국민연금(1층)과 회사원이 의무 가입해야 하는 공적연금인 후생연금(2층)만으로는 국민 노후를 보장하기 어려워 사적연금에 해당하는 기업형·개인형 퇴직연금을 전면 도입해 ‘3층 연금 구조’를 구축했다.
2019년 일본 금융청이 발표한 노후 자산 형성 관련 보고서는 퇴직연금 시장의 변곡점으로 꼽힌다. 당시 보고서는 은퇴한 60대 부부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공적연금 외에도 2000만 엔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아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국가가 일본 국민의 노후를 완전히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던 때 해당 보고서가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전문가들은 일본인들의 투자 성향 개선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로 정부의 ‘금융투자 리터러시’ 제고 노력을 꼽았다. 이는 단순히 관계부처 차원의 홍보 활동이 아니라 퇴직연금 관련 비영리기관(NPO) 활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 가입자 정보 접근성 향상을 위한 제도적 개선 등 다양한 대응을 포괄한다.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보장심의회의 전문위원을 지낸 야마자키 슌스케 파이낸셜위즈덤 대표는 “일본인들의 노후 준비 인식이 10년 전과는 크게 달라졌는데 이는 20년간 누적된 투자 교육 덕분”이며 “일본 정부는 금융 리터러시 제고를 통해 위험자산 투자를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2021년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내놓은 ‘자산 소득 배증 플랜’의 금융 교육 강화 계획이 대표적이다. DC형 제도를 도입한 기업은 근로자들에게 DC형 수익률 현황 정보 제공은 물론 장기적 노후 자산 형성 등에 대한 내용을 정기적으로 교육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했다. 금융 리터러시 강화 기조는 지난해 금융청 관할의 금융경제교육진흥기구(J-FLEC) 설립으로 이어졌다.
후생성은 2027년부터는 기업별 DB·DC 운용 실적 현황을 공시해 현재 기업 내 수익률 비교를 넘어 기업별 비교까지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퇴직연금 현황을 ‘시각화’해 정보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게 기본 정책 방향이다. 류재광 간다외어대 교수는 “수익률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는 수익률 정보공개가 매우 중요하다”며 “DC형 도입 10년째를 맞은 2010년대에 투자신탁에 퇴직연금을 넣었던 직원들이 양호한 수익률을 거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점점 위험자산 투자 문화가 퍼지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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