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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1개 여단 상대한 독일의 전차 에이스, 미카엘 비트만

‘17대 1’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압도적인 상대를 단신으로 물리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일반인들끼리의 주먹다짐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살인무기가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이런 영화 같은 승부는 존재했다.

1944년 6월 13일,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독일의 전차 에이스 미카엘 비트만이 티거-1 전차 1대로 영국군 1개 여단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은 빌레르 보카쥬 전투가 바로 그 것. 이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1944년 6월 6일. 영미 연합군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 서유럽 전선을 형성했다. 동쪽의 소련군과 함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양쪽에서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한 것. 독일은 이를 막기 위해 진작부터 대서양 장벽을 건설해왔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장벽은 노르망디 상륙 당일 뚫려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초반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영국 본토마저 위협했던 독일 공군마저 숙련된 조종사들의 대거 손실, 그리고 압도적인 연합국 공군의 전력에 밀려 별반 힘을 쓰지 못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에서도 묘사됐듯이 노르망디 상륙 당일 연합군을 폭격한 독일 공군기는 달랑 2대뿐이었다.

독일이 의지할 수 있는 카드는 몇 남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육군과 친위대의 기갑부대는 전쟁 초기부터 독일군에게 승리를 안겨준 엘리트 부대였으며, 이 같은 상황에서 가장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전략 예비군이었다.

사실 친위대는 기존의 독일 육·해·공군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히틀러 총통의 경호와 나치당의 적극적인 전쟁 참가를 목적으로 육성된 일종의 당군(黨軍)일 뿐이다. 하지만 요즘도 독일의 축구 국가대표팀을 가리켜 ‘독일 전차군단’이라고 부를 만큼 당시의 독일 기갑부대는 용맹과 전투력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예 부대였다.

당시 노르망디 전선으로 파견된 독일군 기갑부대 중에는 친위대 제1 기갑군단 직할의 제101 중전차대대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곤란한 전투 상황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기 위해 양성되는 군단 직할 특공연대가 있듯이 독일군 중전차대대 역시 일반 기갑부대들이 돌파하거나 제거하기 곤란한 상대만을 골라 맡는 독일군의 해결사였다. 그런 만큼 이 부대는 인원과 장비면에서도 남달랐다.

괴력의 티거-1 전차

제101 중전차대대의 주력 장비는 당시 독일 육군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전차, 즉 티거-I이었다. 우리에게는 영어식 발음인 ‘타이거-I’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티거-1 전차는 종합전투력 면에서 세계 최정상급으로 평가받던 소련군의 T-34 전차를 질적으로 압도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이 전차는 기존의 연합군 주력 전차들을 가뿐히 능가하는 엄청난 화력과 방어력이 특징이었다. 주포로는 56구경장 88mm 포가 달려있었는데, 이 포는 미국과 소련의 주력 전차이던 M-4 셔먼과 T-34를 2,000m 밖에서도 고철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위력적인 포였다. 장갑(전면장갑 기준)도 무려 110mm에 달한다. 이는 셔먼과 T-34 장갑(각각 51mm, 45mm)의 두 배가 넘는다. 이 정도면 2,000m 밖에서 적 전차가 명중탄을 날려 와도 간단히 튕겨낼 수 있는 수준이다.

특히 100m 내의 근접전이라도 티거-1의 전면장갑을 뚫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개활지에서 연합군 주력 전차와 1:1로 전투를 벌인다면 결코 질 턱이 없는 ‘움직이는 토치카’였던 셈이다.

하지만 무적으로 보이는 티거-1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이렇게 강력한 무장과 장갑을 갖춘 탓에 중량이 지나치게 무거워진 것. 실제 티거-1은 전비중량(全備重量)이 무려 56톤에 달한다. 전비중량이란 규정된 탑재물을 모두 실었을 때의 전체 중량을 말한다.

반면 티거-1의 엔진은 불과 700마력 급이어서 속도와 연비, 기동성이 나빴다. 최고 속도는 포장도로에서도 불과 38km/h, 항속거리는 200km에 불과했으며, 비포장도로에서는 그나마 절반으로 깎였다. 따라서 연합군 전차들은 월등한 속도로 거리를 좁힌 후 측면이나 후면을 노린다면 충분히 격파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기량이 우수한 승무원만이 티거-1에 탑승할 수 있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독일군의 티거-1 중전차대대는 2차 세계대전 중 적 전차 수 십대 이상을 격파한 전쟁 영웅들을 다수 배출해 냈다. 제101 중전차대대의 미카엘 비트만(Michael Wittmann) 중위도 그 중 한 사람이다.

1914년생인 그는 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부터 장갑차와 돌격포(보병지원용의 자주포) 차장으로 복무했다. 1941년에는 소련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복귀 이후 친위대 제1 기갑사단 소속 중전차중대의 소대장으로 복무하면서 1944년 초까지 소련 전차 88대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그는 히틀러로부터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그리고 1944년 봄 이 중대를 기간으로 친위대 제101 중전차대대가 편성되자 그는 이 부대의 제2 중대장 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제공권을 뺏기고 연합군과 레지스탕스의 파괴공작으로 철도를 이용한 이동 역시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 부대는 노르망디 전선까지 200km나 되는 거리를 자력으로 이동해야 했다. 연합군 공군기의 폭격으로 전차가 격파당하기도 하고, 고장으로 낙오한 전차도 생겼다. 이에 따라 이동을 시작한 후 5일이 지난 6월 12일에는 비트만 휘하의 전차 14대 중 6대만이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감한 기습공격

당시 연합군은 파리로 가는 길목의 전략 요충지인 캉(Caen)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었다. 캉은 인구 5만 명의 작은 도시지만 주변을 감시 및 통제할 수 있는 고지가 여럿 있어 연합군은 물론 독일군도 놓쳐서는 안 될 곳이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기갑부대는 용맹과 전투력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예 부대로 ‘독일 전차군단’이라는 별칭을 낳게된다.

캉을 방어하기 위해 전선을 형성하고 있던 독일군에 미국 제1 보병사단이 진격하면서 폭 12km의 틈이 형성됐다.연합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영국 제7 기갑사단을 투입, 독일군 교도 기갑사단 후방으로 우회해 빌레르 보카쥬(Villers Bocage) 마을과 그 옆의 213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독일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 이를 통해 독일군을 격퇴하고 캉으로 곧장 진격한다는 게 연합군의 복안이었다.

물론 독일군도 이 같은 연합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월 12일 밤 이 전선의 틈새로 제101 중전차대대가 급파됐다. 이 중 비트만이 소속된 제2 중대는 빌레르 보카쥬 시내를 가로지르는 제175번 국도의 남쪽 200m 지점에 매복했다.

6월 13일 아침 8시경. 영국 제7 기갑사단 예하 제22 기갑여단이 빌레르 보카쥬 서쪽으로부터 입성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이 후방에 독일군, 그것도 티거-1 전차부대가 매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영국군의 출현에 놀란 것은 독일군 쪽도 마찬가지였다. 제175번 국도 인근에 캠프를 쳐놓고 야영을 한 후 13일 아침에 일어난 비트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빌레르 보카쥬 시내에 입성한 영국군을 보았다는 보병의 보고.

비트만이 단신으로 상황을 확인해 본 결과 영국군은 단순한 정찰부대 수준이 아니라 완전 편제된 여단 규모의 대규모 부대였다. 다른 부대를 불러 다함께 반격에 나서면 이미 늦다고 판단한 비트만은 오전 9시경 과감하게 자신의 티거-1 전차를 몰고 영국군 대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독일 전차 에이스의 활약

그의 티거-1은 캉으로 가던 3대의 영국군 전차를 격파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빌레르 보카쥬 마을로 달리면서 영국군 소총여단의 경장갑 차량을 공격했다. 여기에서 그는 반(半) 궤도 장갑차 9대, 카든 로이드 수송차 4대, 기타 수송차 2대, 그리고 6파운드 대전차포 2문을 격파했다. 이어 스튜어트 경전차 3대, 반 궤도 장갑차 1대를 더 격파했다.

빌레르 보카쥬 마을에 단독으로 돌입한 그는 레몬 농장에 있던 크롬웰 전차 4대 중 3대를 격파했다. 또한 클레망소 거리를 따라 달리면서 제5 왕립기병 포병연대 소속의 셔먼 지휘 전차 2대를 격파했으며, 정찰차 1대와 반 궤도 장갑차 1대를 더 격파했다.
비트만이 잔 다르크 광장에 들어섰을 때 영국군의 셔먼 파이어 플라이 전차가 반격해왔다. 파이어 플라이의 17파운드 주포는 티거-1의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유일한 연합군 전차였다.

파이어 플라이는 비트만의 티거-1에 4발을 사격했고, 그 중 1발이 티거-1의 차체에 명중했지만 비트만은 반격해 파이어 플라이를 격파했다. 차체에 경미한 손상을 입은 비트만은 그 후 반전해 클레망소 거리로 돌아왔다. 여기서 살아남은 크롬웰 전차가 티거-1에 2발의 포탄을 명중시켰지만 피해는 없었다. 비트만은 반격해 일격으로 크롬웰 전차 격파했다.

빌레르 보카쥬를 빠져나오던 비트만의 티거-1 좌측 캐터필러에 6파운드 포탄이 명중, 그는 전차를 어느 상점 앞에 정차시킬 수밖에 없었다. 비트만은 그 상태에서도 영국군과 한동안 교전을 계속했지만 결국 전차를 버리고 도보로 탈출했다.

비트만과 휘하 승무원들은 7km 떨어진 독일 교도 기갑사단 사령부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교도 기갑사단 예하 제130 기갑연대의 제2 대대 소속 4호 전차 15대가 빌레르 보카쥬의 북쪽 출구를 막기 위해 출발했다.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영국군 대전차포가 그들을 덮쳐 진격은 발이 묶였다. 교도 기갑사단장 프리츠 바이엘라인 장군은 4호 전차 부대에게 후퇴해 빌레르 보카쥬에서 재집결할 것을 명했다. 이 부대의 잔존 전차 14대는 수리를 받은 후 두 그룹으로 나뉘어 4대는 빌레르 보카쥬 남쪽, 10대는 클레망소 거리에서 재공격을 시도했지만 각 그룹에서 2대씩 모두 4대의 전차를 더 잃었다.

비트만은 그 후 슈빔바겐을 타고 213 고지로 돌아가 제101 중전차대대의 제1 중대장 롤프 뫼비우스에게 재차 공격을 가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제101 전차대대의 티거-1 전차들은 데브레시 거리를 따라 마을에 진입했고, 빌레르 보카쥬 시장에서 교도 기갑사단 소속 4호 전차들이 합류, 공격을 지원했다.

이 부대는 파스퇴르 거리에서 조프레 부바르에 이르는 지역을 지켜냈지만 영국군의 반격은 이제 체계가 잡혀가고 있었고, 독일군은 기습의 이점을 잃었다. 장 베이컨 거리에 배치된 영국군의 6파운드 대전차포 1문이 3대의 티거-1을 격파했고, 그 중 수리 가능한 전차는 1대뿐이었다.

영국군은 13일 오후까지 끈질기게 빌레르 보카쥬를 독일군으로부터 지켜냈다. 하지만 너무나 엄청난 피해에 겁을 먹은 영국군 지휘부는 수개 여단이나 되는 예비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빌레르 보카쥬에 증원 병력을 보내지 않는 어이없는 오판을 저질렀다.

결국 영국군은 오후 4시 빌레르 보카쥬를 버리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사, 부상, 포로 등 인명피해가 616명에 달했고 전차와 장갑차는 각각 57대, 31대의 손실을 입었다. 반면 독일군의 피해는 전차 9대, 사상자 23명에 불과했다.

영국군의 졸전과 선전선동

빌레르 보카쥬에서 철수하면서 독일군의 전선을 혼란시키고 캉을 손쉽게 점령하려던 영국군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역사가들은 계획의 부실한 수행 때문에 하늘이 내린 기회를 잃었다고 평가한다. 실제 영국 제2군 사령관 마일즈 뎀프시 장군은 후일 “이 전투의 모든 작전운용은 매우 치욕적”이라고까지 말했다. 당연히 이 패배의 대가로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쳤다.

빌레르 보카쥬에 투입됐던 해당 부대 지휘관인 30군단장 제라드 버크놀 중장, 영국 제7 기갑사단장 조지 어스킨 소장, 제22 기갑여단장 하인드 준장, 왕립포병 연대장 등 고위 지휘관들이 줄줄이 해임된 것. 이후 빌레르 보카쥬 마을은 영국 공군에 의해 철저히 폭격을 당해 초토화 됐으며, 8월 4일 연합군에 함락됐다.

하지만 독일군의 작전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군 내에서도 비트만의 단독 기습공격이 지나치게 무모했으며, 아군 병력과 함께 공격했어야 기습의 성과를 높일 수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실제 이 전투에서 비트만은 전투개시 불과 15분 만에 놀라운 전과(전차 12대, 대전차포 2문, 장갑 병력 수송차 10여대 격파)를 올리기는 했지만 곧 영국군이 방어태세를 굳히자 전과를 더 올리지 못하고 피격당해 탈출해야 했다. 이후 더 많은 독일 전차들이 투입됐지만 영국군의 반격에 상당수가 파괴된 점을 놓고 볼 때 이 비판은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점을 감안하더라도 독일군이 빌레르 보카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독일의 선전당국은 전투가 끝난 직후인 13일 저녁 비트만을 라디오 방송에 출연시켰다. 그리고는 빌레르 보카쥬 시내를 샅샅이 촬영해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보도했다. 비트만이 격파한 연합군 전차 수만 해도 실제보다 3배 가까이 많은 27대로 보도했을 정도다.

그리고 비트만을 대위로 특진시킴은 물론 백엽 기사 철십자훈장의 상급 훈장인 백엽 검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하는 등 패색이 완연하던 당시의 전황을 감추기 위해 각종 선전선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패한 영국군도 선전선동에서는 만만치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역시 비트만을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엄청난 영웅으로 치켜세움으로서 자신들의 패배를 합리화하려 고 했던 것이다.

비트만의 최후

비트만은 확인된 것만 해도 전차 138대, 대전차포 141문 격파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한 사람의 영웅이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은 계속 밀리고 있었고, 결국 7월 18일 캉이 함락됐다. 이후 8월 7일 캐나다군은 캉 이남에서 1,000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한 토털라이즈 작전을 벌여 독일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당시 대대장의 유고로 대대장 대리를 맡고 있던 비트만은 제3 중대와 대대 본부에서 7대의 티거-1 전차를 긁어모아 여기에 맞섰다. 하지만 그는 생 애그낭 드 크람스닐 마을 근처의 122 고지를 탈환하려고 시도하다가 타고 있던 티거-1 전차가 8월 8일 낮 12시에 격파되면서 부하 승무원 전원과 함께 숨을 거둔다.

그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연합군 전차부대만 4개나 되고, 심지어는 전투기의 폭격으로 전사했다는 설도 있지만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시신은 종전 후 근 40년이 지난 1982년 프랑스인 전사연구가인 에릭 르뻬브르에 의해 발굴돼 현재는 프랑스 라 캄브의 독일군인 묘지에 묻혀 있다.

글_이동훈 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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