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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요 작가 "미술상 받고도...전시 이후 작품들은 어디로 가나 고민"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이주요]

전시는 짧고 창고엔 길게...예술가 공통의 고민

'러브 유어 디포' 등 통해 미술계의 현주소 담아내

시상식장에 있으면서 대역 세워 직접 수상 거부도

작가 이주요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2019년 올해의 작가상 최종 수상자는 이주요 작가입니다.”

지난달 28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올해의 작가상 2019’ 최종 수상자가 발표되자,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머리칼을 초록색으로 물들인 젊은 여성이 단상에 올랐다. 박수와 술렁거림이 공존했다. 이주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장인 더크 수느아르 벨기에 뷔일스 현대미술센터 관장으로부터 상을 건네받고 마이크 앞에 선 대리 수상자가 덤덤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이며 장내를 바라보던 중, 스피커에서 ‘진짜 이주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업이 가능하게 해 주신 여러 분들과 미술관에 감사드립니다. 카메라를 잡으신 모든 분들의 너른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전시 관련 인터뷰 영상도 만들어야 하는데 첫날부터 (얼굴촬영을) 피하는 것을 이해해 주셔서 ‘참 살 만한 세상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은 명실상부 국내 최고 권위의 미술상이다. 이전엔 수상작가만 발표됐지만 형식을 바꿔 2012년부터는 4명(팀)의 작가를 선정해 개인전을 선보인 후 전시 기간 중 최종수상자 1명을 뽑는 식으로 바뀌었다. 지난 2015년 최종 수상자 오인환이 처음부터 대역을 세워 인터뷰·전시설명·수상과 소감까지 도맡게 한 적은 있지만, 이주요는 시상식 현장에 있으면서도 ‘직접 상 받기’를 거부했다.

2019 올해의 작가 시상식에서 단상에 오른 이주요 작가의 대리수상자.


미술판을 ‘농락’한 작가 이주요를 최근 전시장에서 만났다. 이 작가가 얼굴 보이기를 꺼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28세에 (대안공간) 쌈지 1기로 본격적인 미술계 활동을 시작했는데 젊은 여자작가로 살아내기가 어려웠다”면서 “얼굴에 대한 인물평, 그 연장선상에서 성격 평가로 이어지니 내 작업에 관한 얘기는 나올 시간이 없더라”고 당시 상황을 꼬집었다.

작가에게는 시상식도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사실 그는 자신과 똑같이 옷을 입은 동료작가와 나란히 시상식장에 앉아 있었고, 청중 사이에 숨어 마이크로 소감을 말했다. 이 작가는 “시상식을 축제 분위기로 다 같이 즐기길 기대하지만 국내 작가들 간의 관계성, 사회적 분위기, 진지한 성향 등을 고려하면 경쟁하는 동료들이 서로 미안해하는 구조”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1984년 제정된 영국 터너상(Turner Prize)의 경우 스타 등용문이자 도박사이트가 수상 후보를 점칠 정도로 인기가 높지만, 지난 3일 시상식에서는 후보작가 4명이 심사위원들에게 “작품과 그 안에 담긴 사회적 주제의 우열을 가리지 말아 달라”는 편지를 보낸 결과 사상 초유의 ‘4인 공동수상’으로 결론 났다.

이주요의 ‘올해의 작가상’ 출품작은 미술계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과 체제 전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멘토프로그램으로 만난 후배작가 박지혜가 “작품은 어떻게 보관하나요?”라고 첫 질문을 던지며, 전시 후 애물단지가 된 자신의 작품을 버렸다고 한 이야기가 동력이 됐다.



이주요 ‘파이브 스토리 타워’. 층마다 작가의 작품을 보관하고 맨 위층에는 조명작품을 둬 아래쪽이 잘 보이게끔 설치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짧고 작품이 창고에 있는 시간은 길어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 그리고 소장가들이 선택한 작품들만이 내가 죽은 후에도 ‘이주요 작업’이라는 이름을 달고 남겠죠. 그렇게 미술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한, 경제논리에서 밀려난 작품들은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했어요.”

이 작가는 서울 한복판 미술관을 접근성 좋은 작품 창고 겸 작업 스튜디오로 탈바꿈시켰다. ‘파이브스토리타워’는 좁은 공간을 수직적으로 활용한 5층짜리 ‘보이는’ 창고로, 홍승혜·황수연·박지혜·정지현의 작품이 놓였다. ‘러브 유어 디포(Love Your Depot)’는 수장고를 옮겨놓은 듯한 형태로 임민욱·정서영·박진아 등 걸출한 작가부터 신예까지 작품들이 ‘보관돼’ 있다. 15명의 작가가 협력했고 이주요의 작품 40여 점까지 총 100여 점을 볼 수 있는 전시다. 관객은 어리둥절할 테지만 작가는 당차다. “창고는 작가들이 예술활동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보여줍니다. 콘텐츠 생산을 위한 임대 사무실 ‘스튜디오57’을 비롯해 촬영공간과 수익모델 격인 공구상, 수장고인 창고와 폐기에 관여할 고물상까지 함께 있어 작품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함께하죠.”

이주요 ‘러브 유어 디포’ 전시 전경.


미술관에서 예술적 성과물인 작품을 보여주는 게 통상적이지만, 작가는 기존 시스템을 뒤집어 놓았다.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의 정신없이 파닥이는 물갈퀴를 보여준 셈이다. 소위 ‘잘나가는 작가’인 그조차 안 팔리는 작품을 어떻게 둘지 고민하는 상황은 미술계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작가는 “이곳 전시장의 창고는 ‘심미적 창고’이며 작품 그대로의 물성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라며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자생력을 모색하는 것을 알리기에도 적절하고, 견고한 미술관과 연약한 작가의 공존을 보여주기에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인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동시대적 문제를 다루려 패러다임을 바꾸는 과감하고 영민한 시도를 보여줬다”고 평하고 수느아르 관장이 “과잉생산의 시대에 작품의 제작·보관·기록의 모든 과정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과 실천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평가한 이유다. 이주요는 한진해운의 양현재단이 제정한 양현미술상을 수상한 유일한 한국인 작가이며 국내보다 유럽과 미국에서 더 유명하다. 전시는 내년 3월1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이주요 ‘엘 트라바이(Elle Travaille)’. 임대형 창고에서 수익형 사업시설로 선보인 것이지만 작가는 행사가 끝난 후 버려지는 식물과 전시 후 오갈데 없는 작품을 같은 선상에서 보여준다. /조상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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