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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걸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2.17 05:17:00이정록 전깃줄에 새 두 마리 한 마리가 다가가면 다른 한 마리 옆걸음으로 물러 선다 서로 밀고 당긴다 먼 산 바라보며 깃이나 추스르는 척 땅바닥 굽어보며 부리나 다듬는 척 삐친 게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거다 작은 눈망울에 앞산 나무 이파리 가득하고 새털구름 한 올 한 올 하늘 너머 눈 시려도 작은 몸 가득 콩당콩당 제 짝 생각뿐이다 사랑은 옆걸음으로 다가서는 것, 측근이라는 말이 집적집적 치근거리는 몸짓이 이리 아 -
빨간 내복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2.10 05:50:00공광규 강화 오일장 속옷 매장에서 빨간 내복을 팔고 있소 빨간 내복 사고 싶어도 엄마가 없어 못 산다오 엄마를 닮은 늙어가는 누나도 없다오 나는 혼자라 혼자 풀빵을 먹고 있다오 빨간 내복을 입던 엄마 생각하다 목이 멘다오엿장수 각설이타령 세밑 대목 달구는데 어찌 그리 청승맞게 쭈그리고 앉아 계시오. 소금가마니에서 간수 새나 했더니, 장승 같은 양반 풀빵 먹다 울고 계시는군요. 울던 울음, 마저 우시오. 소금 같던 -
쟈가 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2.03 05:05:00조명희 나는 이름이 두 개다 아버지 술 드시고 출생신고 하러 가서 면서기랑 농담 따먹기 하다 획이 바뀌는 바람에 취학통지서 받던 날 엄마는 아버지를 닦달하였다 어디다 꼬불쳐 놓은 자식이 아닌가 하고 맨 정신으로 면사무소에 다녀온 아버지는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를 가리키며 쟈가 갸여 배고픈 살림에 이름 하나 더 가졌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두 이름을 얻었으니 반반 치킨처럼 얼굴을 반반 나눠 썼는데 쟈는 동아전과 -
노천시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1.27 05:30:00이면우 나무 되고 싶은 날은 저녁 숲처럼 술렁이는 노천시장 간다 거기 나무 되어 서성대는 이들 많다 팔 길게 가지 뻗어 좌판 할머니 귤 탑 쓰러뜨리고 젊은 아저씨 얼음 풀린 동태도 꿰어 올리는 노천시장에선 구겨진 천원권도 한몫이다 그리고 사람이 내민 손 다른 사람이 잡아주는 곳 깎아라, 말아라, 에이 덤이다 생을 서로 팽팽히 당겨주는 일은, 저녁 숲 바람에 언뜻 포개지는 나무 그림자 닮았다 새들이 입에서 튀어나와 -
길음동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1.20 05:18:54신미나막다른 골목에서 만나게 된다 누가 붉은 페인트로 써놓은 소변금지 간판은 의상실인데 과일 파는 집 할머니가 전구를 갈아 끼울 때처럼 헝겊으로 조근조근 사과를 돌려 닦을 때 퇴근 시간쯤 마주치게 된다 얼굴만 아는 뚱뚱한 여자 얼굴에 기미가 들깨가루처럼 핀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욕하며 싸우는 걸 본 적이 있다 울지 않으려고 성을 내며 남편을 걷어찬 적이 있다 그녀와 스칠 때 빙그레 웃음이 난다 그녀를 닮은 뚱뚱한 -
금란시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1.13 05:25:34함민복좌판의 생선 대가리는 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다꽁지를 천천히 들어봐꿈의 칠 할이 직장 꿈이라는 샐러리맨들의 넥타이가 참 무겁지대양을 누비며 헤엄치던 신사들이 삼삼오오 좌판에 모였군요. 구름처럼 모여서 군무를 출 때처럼 머리를 가지런히 한쪽으로 두었군요. 많은 직장에서 정장이 사라지고, 노타이가 유행해도 주식회사 바다에선 아직도 복식 규정이 엄격하군요. 꽁치 넥타이, 고등어 넥타이, 삼치 넥타이가 반듯하 -
산다는 것의 의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1.06 06:00:55이시영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밖에 안 된 집을 부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 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 날라다주었기 때문이다.1976년의 일이다. 충청도 산골에서 어떤 소년이 다람쥐 한 마리를 사로잡아 체 속에 가두었다. 장차 쳇바퀴 돌리는 서커 -
올해의 귀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2.30 06:01:30박노해12월의 밤이 깊으면 고요히 방에 홀로 앉아 수첩을 펴고 한 해를 돌아본다나에게 선물로 다가온 올해의 귀인은 누구였던가나를 남김없이 불살라 빛나던 올해의 시간은 언제였던가세상을 조금 더 희망 쪽으로 밀어올린 올해의 선업은 무엇이었던가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올 한 해 나는 누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던가누구에게 모질었던 그늘이었던가 누구를 딛고 올라선 열정이었던가가만가만 눈이 내리고 여명이 밝아 -
강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2.23 06:02:58이재무아프고 괴로울 때 강으로 왔다 무엇이 간절히 그리울 때 강으로 왔다 기다림에 지쳤을 때 강으로 왔다 억울하고 서러울 때 강으로 왔다 미움이 가시지 않을 때 강으로 왔다 분노가 솟구칠 때 강으로 왔다 자랑으로 흥분이 고조될 때 강으로 왔다 마음이 사무칠 때 강으로 왔다 내가 나를 이길 수 없을 때 강으로 왔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오면 나는 꽃 한 송이 사들고 강으로 왔다 강은 바다에 미치면 죽는다너는 나를 보러 -
완행열차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2.09 06:03:42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 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모를 뻔하였지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 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은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속도의 왕국에 아직도 완행열차가 남아 있다니. 조그만 간이역이 아직껏 남아 -
우주로 가는 포차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2.02 05:30:00박해성 作방파제를 바라보며 엉거주춤 주저앉은 포장마차는바람이 불 때마다 곧 날아갈 듯 죽지를 퍼덕인다 노가리를 구워놓고 재채기하듯 이별을 고하는 남자 그 앞에서 여자가 운다, 나는 번데기를 좋아하고 당신은 나비를 좋아하지 소주잔을 비우며 그가 중얼거린다 그래, 어차피 그게 그거니까… 자, 한잔 더술맛도 모르면서 무슨 시를 쓰니, 밤꽃이 흐드러진 유월 숲을 등지고 서 있던 사람 얼굴을 반쯤 덮은 수염이 고독처럼 -
기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1.25 06:00:18내 기일을 안다면 그날은 혼술을 하겠다 이승의 내가 술을 따르고 저승의 내가 술을 받으며 어려운 걸음 하였다 무릎을 맞대겠다내 잔도 네 잔도 아닌 술잔을 놓고 힘들다 말하고 견디라 말하겠다마주 앉게 된 오늘이 길일이라 너스레를 떨며 한 잔 더 드시라 권하고 두 얼굴이 불콰해지겠다산 척도 죽은 척도 고단하니 산 내가 죽은 내가 되고 죽은 내가 산 내가 되는 일이나 해보자 하겠다가까스로 만난 우리가 서로 모르는 게 -
나비는 길을 묻지 않는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1.18 05:05:08박상옥나비는 날아오르는 순간 집을 버린다. 날개 접고 쉬는 자리가 집이다. 잎에서 꽃으로 꽃에서 잎으로 옮겨 다니며 어디에다 집을 지을까 생각하지 않는다. 햇빛으로 치장하고 이슬로 양식을 삼는다. 배불리 먹지 않아도 고요히 내일이 온다. 높게 날아오르지 않아도 지상의 아름다움이 낮은 곳에 있음을 안다. 나비는 길 위에 길을 묻지 않는다.길을 묻지 않으니 삐뚤빼뚤 갈지자로 날아가는군. 내비게이션을 써 보면 달라질 -
즐거움 사용법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1.11 05:00:17이기철즐거워지려거든 노랑 양산을 펴 봐 다정해지려거든 면장갑을 껴 봐 모란 잎이 양산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괜찮아 노래를 불러도 즐거워지지 않는다면 면도날로 악보를 갈기갈기 찢어 봐 코. 펜. 하. 겐이라 무의미하게 써 보는 것도 방법이야 다섯 번쯤 쓰면 1그램쯤 즐거워질 거야 음악을 쟁반에 담아 들고 오이처럼 먹어 봐 애인을 껴안다가 호주머니의 앵두가 다 터져버렸을 때를 떠올려 봐 즐거움은 소모품이야 너도 즐거 -
한 시간 지나도록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0.11.04 05:00:02조은가난한 동네에서 돈을 주웠다 꼬깃꼬깃한 삶이 느껴졌다주워도 시원찮을 사람이 잃었을 돈이었다 지갑 하나 못 가졌을 사람의 돈이었다 주운 만큼 더해 돌려주고 싶은 돈이었다무엇에 놀라 내던지고 갔을 돈이었다 그땐 종이쪽 같았을 돈이었다차곡차곡 간추려 들고 서 있었다 문짝 없는 장롱에 기대서 있었다 골판지를 깔고 앉아 기다렸다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예나 제나 돌고 돌아 돈이라 하더군. 처음엔 세상 물정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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