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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금융위기와 한국의 자존심/안순권 국제부장(데스크 칼럼)
입력1997-09-05 00:00:00
수정
1997.09.05 00:00:00
안순권 기자
동아시아경제가 중대한 시련을 맞고 있다. 최근 동아시아 각국의 경제뉴스중 희소식은 드문 실정이다. 올 상반기만 하더라도 동아시아는 홍콩반환으로 들떠 있었다. 외신은 홍콩반환으로 동아시아경제에 당장 큰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대중화경제권의 탄생」이란 용어로 잔뜩 장밋빛 전망을 부각시켰다.그러나 그동안 동남아시아 경제는 멍이 들고 있었다. 태국에서 시작된 통화위기의 불똥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으로 옮겨 붙으면서 동남아경제는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올들어 이들 국가는 주가와 통화가치가 약 30%나 떨어졌다.
동남아를 휩쓴 금융위기는 마치 기압골이 동진하듯 홍콩, 대만, 한국에까지 밀려들었다.
동아시아는 그동안 「세계의 성장센터」로 불려왔다. 세계에서 가장 성장률이 높고 역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모습은 이같은 명성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실망스럽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우선 견인차역할을 해온 일본부터 경제가 예전같지 않다. 90년대초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시작된 복합불황의 터널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등 4마리용은 모두 수출이 부진하다. 중국을 제외한 후발그룹은 금융위기의 한파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반면 미국은 7년째 호황이 계속 되고 있고 유럽도 올해는 8년만에 3%대의 성장이 예상되고있다. 도무지 살아날 것같지 않았던 러시아, 동유럽과 중남미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최근 경제가 청신호를 켜고 있다. 마치 기상이변을 일으키는 엘니뇨가 한 대륙의 농사를 망치듯 동아시아에 고약한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어 경제가 맥을 못추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상황이 이러니 이른바 「음모설」도 나올 법하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동남아의 통화위기를 부추긴 배후인물로 미국의 금융재벌 조지 소로스를 겨냥, 꽤 호응을 받은 것은 이같은 답답한 심정을 파고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외신의 주요 사건에는 늘 음모설이 뒤따르는 법이다. 최근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가 이집트 재벌아들과 동승한 승용차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이집트 언론이 즉각 음모설을 제기한 것도 하나의 예다. 다이애나가 회교도와 교제하는 것을 눈엣가시로 본 영국정보기관의 사주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음모설에 휩쓸리다보면 본질을 놓칠 위험이 있는 것이 국제뉴스의 세계다. 조지 소로스 등이 동남아경제를 망치려고 환투기를 일삼았다는 일부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수긍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동남아각국이 원인을 제공한 측면을 더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경상적자가 눈덩이처럼 확대되니까 환율흐름이 극도로 불안해져 외환투기꾼들이 한탕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몸이 허약해지면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이치와 같다.
우리는 그동안 동남아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소득수준이 월등히 높은 데다 우리 축구대표팀이 동남아국가팀을 가볍게 이겨온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신을 보면 이같은 우리의 자부심에 먹칠을 하는 기사가 눈에 띈다. 미국, 유럽 등의 전문가들이 한국과 동남아를 같은 선상에 놓고 「헤지펀드의 다음 타깃」 운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이나 동남아나 금융산업이 취약하고 수출경쟁력이 한계에 도달한 것은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이다.
최근 한국경제의 실상을 보면 이들을 탓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한보부도, 기아사태와 그로 인한 주가폭락, 원화환율급등 등 한국경제의 허약한 모습을 그들에게 너무 많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동남아 경제위기는 아무리 잘 나가는 경제도 반드시 고비를 만난다는 경제성장사의 경험칙을 새삼 생각나게 한다.
한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최근의 경제위기를 구조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이 이 위기를 효율적으로 극복, 우리를 성장모델로 삼고 있는 동남아국가들에 멋진 교훈을 남긴다면 우리의 자존심을 그나마 세우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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