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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유목 경계선 만리장성 기행] <1> 실크로드 시작 하서회랑을 가다

흔적만 남은 동서교류 관문에 다시 서부대개발 모래바람<br>무역독점·중앙아시아 지배하려 한무제 때 하서4군 연결해 건설<br>흉노 막기위한 1,000여㎞ 성곽 일부 봉화대만 남고 사라졌지만<br>란저우·우웨이·주취안·장예 등 도시 곳곳에선 건설 공사 한창

양관 앞에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 고대 상인들은 이런 곳에 길을 내며 동서교역을 진행했다. 한 여행객이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고대 실크로드의 중국쪽 관문이었던 양관의 흔적은 사라지고 봉화대만 외롭게 남아 있다.

란저우역 앞에 있는 마답비연(馬踏飛燕) 동상. 말이 밟고 있는 것은 제비로 그만큼 빠르다는 의미를 가진 실크로드의 상징이다.

하서회랑은 북쪽 고비사막과 남쪽 치롄산맥 사이 동서 방향으로 난 폭 80㎞, 길이 1,000㎞의 회랑 지대. 란저우에서 오아시스 도시인 우웨이·장예·주취안·둔황에 이르는 길.

만리장성은 방어용만은 아니다. 오히려 공격 측면이 강하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중국(한족)은 북방 이민족 거주지역을 점령한 후 성을 쌓았다. 이민족들의 반격을 막기 위해 성곽을 강화하고 길이도 늘렸다. 결국 지금과 같은 장성이 된 것이다. 장성을 통해 내지의 안전을 확보한 후 다시 팽창에 나섰다. 장성의 역사는 대략 기원전 3세기 진나라에서 시작된다. 이후 한나라는 만리장성을 발판으로 본격적으로 팽창해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북쪽으로는 흉노를, 동쪽으로는 고조선을 침략한다. 만리장성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건설과 방치가 반복됐다. 지금의 형태는 명나라 때 완성됐다. 시리즈 1회에서는 중앙아시아로의 팽창 욕망을 품은 하서4군을 중심으로 실크로드라는 서쪽 팽창로를 살피고 이후 3회에 걸쳐 만리장성의 나머지 주요 지역도 살펴본다. 만리장성은 한족과 비(非)한족, 농경민과 유목민의 경계였다.

중국 서북쪽의 최대 도시로 인구 300만을 헤아리는 란저우(蘭州)에 인천을 떠난 비행기가 사뿐히 내렸다. 시내를 들어서니 우선 민족구성이 복잡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가 바로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다른 민족들이 이 도시에 들어와 거주한다.

시내를 동서로 가르며 황허가 흐른다. 정확히는 황허를 따라 란저우 시가지가 형성됐다. 실크로드는 이 황허를 건너면서부터 시작된다. 버스가 쭉 뻗은 고속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달렸다. 차창 밖의 풍경은 누런 황토다. 이 황토가 강물을 누렇게(黃) 만들어 황허(黃河)가 됐다.

버스는 과거 실크로드의 길을 따라 왕복 4차선인 고속도로를 달렸다. 다니는 차량이 적어 도로는 막힘이 없었다. 버스는 여러 도시를 지나갔다. 란저우에 가까운 쪽에서부터 우웨이(武威)ㆍ장예(張掖)ㆍ주취안(酒泉)ㆍ둔황(敦煌) 등이 있다. 이들은 중국의 다른 여러 도시들처럼 시끄럽고 먼지가 많았다. 그리고 어디서나 건설공사장이다. 이미 서 있는 건물보다 건설 중인 건물이 더 많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서부대개발 정책 영향이 여기 중국의 끝에까지 미치는 모양이다.

고속도로를 대략 1,240㎞ 달리면 둔황이 나오고 다시 70㎞를 더 가면 양관이라는 곳이 있다. 양관은 과거 실크로드의 중국 쪽 마지막 관문이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서역은 양관 이후의 모든 땅이다. 양관에는 현재 성곽은 없어지고 인근에 몇 개의 봉화대만 남아 있다. 그래서 서운했던지 모형으로 양관의 형태를 만들어놓았다. 이름하여 '양관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한나라 때 서역의 개척자라는 장건이 폼 나게 동상으로 서 있다. 봉화대에서 바라보면 온통 황무지뿐이다. 이곳을 지나면 모래로 바뀐다. 즉 사막이다. 현재의 지역구분으로 신장위구르자치구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버스로 달려온 도시들을 연결해 고대에는 하서회랑(중국명 河西走廊ㆍ허시주랑)으로 불렀다. '허시'라는 것은 '황허'를 줄여서 부르는 '허(河)'의 서쪽에 있다는 의미다. '회랑'이란 긴 통로로 남쪽 치롄산맥과 북쪽 고비사막 사이에 80㎞ 정도 폭의 좁고 기다란 지역이 1,000㎞ 이상 존재한다.

이 지역은 분명 건조지역이지만 그래도 물이 좀 있다. 치롄산맥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비사막으로 흘러가면서 중간중간에 강과 오아시스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이 살거나 이동하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하서회랑은 일찍이 유사 이래 동서교통로로 이용됐다. 이 지역을 최초로 지배했던 것은 역사상 '월지'라는 민족이다.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하면서 동서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변화가 생긴다. 유명한 저 '흉노'가 팽창하면서 월지를 밀어내고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흉노의 묵특 선우는 중국 한나라를 압박해 고조 유방에게 '형제관계'라는 굴욕을 주기도 했다.

이제 하서회랑이 중국의 국가정책에 사활이 걸린 지역이 됐다. 하서회랑에 중국식 도시를 건설한 사람은 기원전 2세기 한무제다. 목적은 두 가지. 흉노의 서쪽 옆구리를 치는 것과 함께 서역과의 무역독점을 통한 국부의 증대다. 무제는 흉노를 북쪽으로 밀어내고 하서4군(지금의 우웨이ㆍ장예ㆍ주취안ㆍ둔황)을 세웠다. 나아가 중앙아시아로 군대를 파견해 지배체제 아래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길게 장성을 쌓는다. 당시의 장성은 높이 3~4m의 담을 쌓아 흉노의 기병이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단순 구조였다. 이런 장성이 란저우 북쪽에서 양관까지 1,000여㎞ 연결됐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초소를 만들어 경비병을 주둔시켰다. 한대 장성의 흔적은 지금도 고속도로를 따라 많이 볼 수 있다.

교통로를 유지하고 서역과의 무역에 드는 비용은 엄청났다. 한나라 이후 장성은 때로 방치되고 중국군은 후퇴한다. 하지만 주민과 문화는 남았다. 도시들은 여전히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 동서교류도 활발했다. 중국군이 물러간 자리에는 각각의 토착 정권이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당ㆍ명 등 역대 중국 통일정권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서회랑을 지배하려고 했다. 이 지역이 관심에서 멀어진 것은 근대 들어 교역로가 바닷길로 바뀐 뒤부터다.

하서회랑은 지역구분으로는 간쑤성(甘肅省)에 해당한다. 간쑤성은 지금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다. 하서회랑은 역대로 중국이 강했을 때 번영을 누렸고 약했을 때는 방치됐다. 하서회랑은 지금 대규모의 공장이라 할 정도로 개발이 한창이다. 중국 정부는 서부대개발 정책 차원에서 인프라를 포함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간쑤성이 중국의 번영을 위한 지역균형 개발의 시금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서회랑에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힘을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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