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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덩샤오핑

오는 2월19일은 경제 강국 중국 건설을 이끌었던 덩샤오핑(鄧小平)의 사망 10주기 기념일이다. 1920년대 초 저우언라이와 함께 프랑스에 유학한 덩샤오핑은 중국에 돌아와 지하활동을 벌이며 대장정, 일본과의 유격전에서 크게 활약했다. 지난 56년에는 52세에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겸 총비서가 됐다. 이후 그는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으로 피폐해진 중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문화혁명의 ‘역풍’을 맞아 두번씩이나 숙청을 당했다. 78년 재집권한 덩샤오핑은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다”고 주장하며 중국 경제 재건을 위해 외국 기업 우대정책들을 속속 도입했다. 중국의 값싼 인건비와 세제 혜택에 매력을 느낀 외국 기업들은 대거 중국으로 몰려들었고 선전ㆍ주하이ㆍ상하이ㆍ광저우 등 대도시들은 눈부신 번영의 가도에 들어섰다. 절대빈곤 상황에 놓여 있던 농촌도 시장 경제 동력에 힘입어 차츰 활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89년 천안문 사건이 터지면서 중국 경제는 다시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천안문 학살을 이유로 중국에 등을 돌렸고 중국 내부에서는 보수파들이 “자본주의 국가들이 중국의 붕괴를 획책하고 있다”며 “개방경제에서 조롱(鳥籠ㆍ새장)경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도 반전(反轉)의 주인공은 덩샤오핑이었다. 중국 경제가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렸던 92년 1월 덩샤오핑은 우창ㆍ선전ㆍ주하이ㆍ상하이 등을 시찰하며 “정책이 자본주의적인가 사회주의적인가를 걱정하지 말고 단지 중국을 더 번영하게 할 것인지만 걱정하라”며 ‘시장 경제’를 전도했다. 이후 중국의 체제는 헌법에 ‘사회주의시장경제’로 명시됐고 ‘개방’은 되돌릴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다. 78년 당시 개인 소유 자가용 승용차가 단 한대도 없었던 중국은 덩샤오핑을 만나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153㎝의 단신이었던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있다. 그런데 ‘작은 거인’의 10주기를 맞은 요즘 중국의 신문ㆍ방송은 조용하다. 덩샤오핑을 기념하는 특집기사도 다큐멘터리도 거의 없다. 이 점을 중국인들에게 지적하면 “그러네요. 장쩌민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는데…”라고 갸우뚱한다. 이렇게 가라앉은 덩샤오핑 추모 분위기가 ‘사회주의조화사회’ 및 ‘공부론(共富論)’을 표방하는 후진타오 정부에서 외국 자본에 대한 혜택을 대거 없애고 자국 자본 감싸기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단언하기 이르다. 덩샤오핑 재집권 이후 30년간 지속돼온 중국의 ‘개방정책’이 역사적인 변곡점에 도달했는지 여부 역시 좀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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