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의 방법론으로서 ‘자주적’ 통일이 강조되고 있지만 주변 강대국들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4대 강국, 즉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 둘러싸여 있어 통일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이들과의 정치외교적 협력은 필수적이다. 한 세기 이상 지정학적 이점을 차지하기 위해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 정세에 깊숙이 개입해온 이들 네 나라는 다른 무엇보다 한반도의 현상 유지(status quo)를 원한다. 겉으로는 ‘통일 한국’의 등장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내심으로는 한반도가 현재 상태대로 유지돼 동북아에 큰 지정학적 변화가 없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지난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간 제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도 드러났다. 미국ㆍ중국ㆍ일본ㆍ러시아 등 4대 강국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일제히 환영을 표시했으나 남북한 지도자들의 빈번한 만남은 경계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멤버이기도 한 주변 4강은 한반도 정상회담으로 행여 한반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 자국의 영향력이 축소되지 않을까 내심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 사태에 깊이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대북 강경파인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을 밀어내고 중도 온건파를 중용하면서 임기내 가시적인 북핵 문제 해결에 총력을 쏟아왔다. 하지만 미국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6자회담의 한반도 비핵화 논의와는 별도로 남북한이 경제협력과 평화체제 구축 등의 문제에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것은 우려하는 눈치다. 북한이 핵 불능화를 넘어 핵 폐기에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서 대북 경협 확대로 자칫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를 잃을 수 있다는 게 미국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 폐기한 후에라야 50여년 지속돼온 한반도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안보체제를 구축하는 내용의 장기 계획을 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美, 남북경협 확대로 北압박카드 잃을까 고민
中, 북한 붕괴때 국경 맞댄 동북방 동요 우려
日, 자위대 강화등으로 불가피한 변화 대비
러, 천연자원 바탕 동북아 영향력 확대 노려 10여년간 경제력이 확대되면서 한국 통일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 중국 역시 한반도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이 붕괴될 경우 중국의 동북방이 동요해 정치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지속적인 경제발전도 어려워진다는 점에서 당분간은 한반도 평화유지에 무게를 두고 있다. 중국은 또 북한의 최대 교역국이라는 점에서도 북한의 안정을 원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의 교역액수는 지난해 16억9,960만달러에 이어 올해 18억달러를 무난히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중국은 한반도에서 자국의 영향력이 감소되는 것은 극히 경계하고 있다. 최근의 역사왜곡 사태를 불러 온 동북공정(東北工程)도 북한의 변화에 대비, 역사적으로 분쟁지역이 될 수도 있는 동북지역에서 미리 사회문화적 제어장치를 확보해 두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의 기조는 자국의 영향력이 지속되는 범위 안에서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유지되는 것이다. 한국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나라인 일본은 내심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바라지만 불가피한 변화에 대해서는 단단히 준비하는 모습이다. 일본인 납치문제로 북한과의 수교를 견제하면서도 수교의 전제가 될 식민지 지배 등 과거사 청산문제와 관련, 상당한 규모의 대북 경협자금도 미리 준비해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또한 한반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한반도 통일 지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일본이 기회있을 때마다 헌법 개정을 통해 자위대의 규모와 작전 범위를 한반도 주변 수역을 넘어 동ㆍ남중국해까지 깊숙히 확대하려 하는 것도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겨냥한 것이다. 요컨데 일본의 입장은 미국과 보조를 맞추며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되 미국의 입장 변경에 따라 생길 수 있는 한반도 주변의 정치적ㆍ군사적 변화에 재빨리 대응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위대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 유사시 미군을 대체한다는 계획도 포함된다. 구소련 해체이후 정치적, 경제적 혼란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러시아도 서서히 동북아문제에 관심을 회복하고 있다. 러시아는 그 동안 내부 정치문제와 동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에 집중하면서 동아시아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이 북한이 중국과 크게 가까워진 점을 주목하고 있다.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은 최근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있는 푸틴 대통령이 석유와 가스 등 막대한 천연자원을 통해 얻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지에 따라 매우 탄력적으로 변할 것으로 보인다. 퍄오젠이(朴健一)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연구소 교수는 “한반도의 통일 실현은 남북한 정부와 국민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주변 4강을 설득해 나가는지에 달려 있다”며 “한반도에서의 통일을 향한 변화는 주변 강대국들간에 새로운 질서의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한 복잡한 경쟁과 협력을 촉발할 전망”이라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