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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소설 '남한산성' 유감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치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좀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칸은 다시 일산 안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 요즘 장안의 베스트셀러인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장면이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평민의 옷을 입고 세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소위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 의식을 하면서 머리를 땅에 찧는 소리가 청 태종의 귀에 들리지 않으면 다시 머리를 찧어야 했기 때문에 항복 의식을 마친 뒤에는 머리가 붉은 피로 물들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때문인지 우리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장면 중의 하나를 그리고 있는 김훈의 필치는 매우 냉소적이다. 기운이 거의 빠져나간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올 정도로 기진맥진하고 있는 국내 문학계에서 중장년층 남성 독자를 끌어모으면서 새로운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소설 ‘남한산성’이지만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한마디로 ‘비루함의 결정체’이다. 명분론에 휘말려 실력을 갖추지 못한 채 위선적인 언사와 문장만을 날리고 있는 사대부 문화에 대한 냉소를 머금은 김훈이 소설에서 소개하고 있는 청 태종의 문장론은 매우 인상적이다.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학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사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들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그렇지만 소설이 비웃는 대목이 떨어지는 해 명나라를 섬기느라 청나라의 실력을 모르고 감히 저항하려 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무지함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청나라에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항복했던 바로 그 사실 자체에 대한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하지만 중국을 지배한 만주족의 청나라처럼 조선은 왜 대륙으로 나가려는 기백이 없었느냐는 식의 비분강개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어쨌든 소설 ‘남한산성’을 읽노라면 일본이 완성한 식민지 사관에서 묘사되고 있는 무기력한 조선시대의 ‘타율적 세계관’이 적나라하게 읽힌다. 인구 60만명의 만주족이 인구 600만명의 조선을 먼저 항복시키고 인구 1억5,000만명의 명나라를 접수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면서 만주족 특유의 웅혼한 ‘상상력’과 ‘실력’에 감탄이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당대의 우리 지식인들이 그토록 멸시의 대상이 돼야만 했을까. 청나라 군대를 맞이하는 북경의 지식인들이 보여준 비루한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섭정왕 다이곤이 명나라의 항복군을 포함해 15만 군사를 이끌고 북경성에 입성하자 명나라 관리들과 지식인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머리를 미는 오랑캐식 변발을 하거나 급하게 구한 만족 복장으로 치장하고 ‘대청 황제 만세 만만세’를 불러대 침략자 청군을 놀라게 만들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청나라가 세계 최대 강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주변 모든 이민족들이 중국으로 편입됐지만 조선만은 속국의 형태라고는 해도 엄연한 독립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지식인들의 꺾일 줄 모르는 의연함과 독립정신 때문인 것을 너무 부인해서는 안 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중국을 방문한 조선 사신단의 물건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은 마을이 통째로 청나라 황제의 특명을 받은 관군에 치도곤을 당하는 대목이 나온다. 청나라를 방문했던 조선 사신단은 그만큼 일국의 외교 사절로 충분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 사대부들이 비록 여러 가지로 무능하기는 했으나 나라의 자존과 독립정신을 고집스럽게 지켜낸 그런 역할까지 깔아뭉개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는 게 무엇인지,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소설 ‘남한산성’이 요즘 지식인들에게 유독 인기라고 해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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