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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정상은

2003/4/26(토) 쾌청 명산회에 얹혀 (박 대장 외 15명), 회비 20,000 원 양재역 (7:30) &#8211; 죽암휴게소(8:55-9:15)- 현풍 휴게소(11:10-20) &#8211;창녕여중(11:42) &#8211; 매표소 (11:50) &#8211; 공중 화장실(12:07) &#8211; 자하정(12:13) &#8211; 첫봉우리 (12:45) &#8211; 초소 (13:00) &#8211; 배바위 (13:10) &#8211; 화왕산성 동문 (13:25) &#8211; 정상 (1:50-14:00) &#8211;서문 노점 (14:20) &#8211; 환장고개 - 공중화장실 (15:10) &#8211; 출발 (15:55) &#8211; 추풍령 휴게소 (17:30-50) &#8211; 양재역 (20:00) 화왕산 동쪽 능선에서 정상을 향하여 비온 후 맑은 4월의 마지막 토요일 이번 달은 서울에 비가 열번이나 내렸다니 자주도 왔다는 얘기다. 봄 가뭄과 산불 걱정을 덜어줘 더 없이 좋지만 야외로 나가려고 하는 사람으로서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어제 밤 늦게만 해도 오늘도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이라 망설였다. 하지만 흔치 않은 4월 태풍이 밤을 지나며 빠져 나갈 거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이 달의 마지막 토요일을 멋지게 장식하기로 했다. 날씨는 예보대로 맑고 서초구민회관에 오니 관광차들이 도로가에 빈틈없이 늘어서 있어 늦게 온 차는 댈 수 도 없다. 끝까지 가 보았으나 내가 탈 버스가 안 보인다. 되돌아오는데 한 분이 명산회라고 소리쳐 따라가니 도로 둘째 줄에 차가 서 있었다. 상춘객이 부쩍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대장님까지 16명. 이래도 장사할 수 있나 싶다. 45인 석인데 사람이 적으니 이용객으로서는 널널해서 좋다. 30명이 넘게 신청했었는데 날씨 때문에 찬물에 뭐 줄 듯 반 토막도 못 건졌단다. 비슬산 행 두 산악회는 아예 인원 미달로 취소를 했다고 한다. 정말 날씨는 우리 생활에 너무 영향이 큼을 알 수 있다. 산천은 연두색으로 생명력 넘쳐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잘 빠진다. 산과 들의 초목은 비가 내린 끝이라 한층 봄색을 산뜻하게 하고 흙도 물기를 충분히 머금었다. 금년 농사는 순조로울 것 같은 예감이다. 입산금지도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잘 못 본 것인지 모르지만 배꽃은 거의 다 떨어진 것 같고 안성의 포도밭 시렁에도 진한 새순이 나온다. 참나무와 그 외 활엽수들의 어린 연두색 잎은 생명력이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겨우내 그렇게 볼품없고 스산해보이던 산이 이제는 가득 차 있어 다른 뭐가 비집고 들어 갈려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다. 죽암 휴게소에 들르니 (8:55-9:15) 벌써 달려온 관광차들이 빼곡이 서 있다. 토요일을 쉬는 회사들이 많아진 때문인가? 아직 토요일 오후 귀경엔 교통체증은 없는데 토요일 나들이의 프리미엄도 얼마 안 가면 없어질 것 같다. 담쟁이가 비슷한 연녹색으로 방음벽을 온통 뒤덮고 있는 곳도 나타나고, 활짝 핀 홍매화, 노랗게 핀 무우꽃 (공자리)도 눈에 들어온다. 향기 그윽한 수수꽃다래(라일락)도 곳곳에서 연보라색으로 봄을 구가하고 있다. 중간 중간 시야를 가리던 안개도 대전을 넘어서 부터는 완전히 걷힌다. 신문이나 책을 꺼낼까도 했었는데 자연의 봄 잔치를 차창으로 내다보는 게 더 나을 성 싶어 진작 포기한 터다. 아쉬움 남았던 비슬산을 바라보며 한잠 주무시고 난 박대장님은 지나가는 길목의 산을 몇 개 소개한다. 남쪽 멀리 우뚝 서 평상처럼 비스듬히 능선을 이룬 산이 약수암이 있는 금오산이라고 일러준다. 지금은 구미시민의 공원이 되어버린 이산은 가을 등반에, 옥천 근처의 천태산은 봄 가을 등반에, 직지사가 있는 김천의 화악산은 5월 말이나 가을에 오르기 좋은 산이란다. 대구의 팔공산도 빼 놓치 않는다. 구미의 낙동강은 꽤 불어난 흙탕물이 뒤척이며 흐른다. 둔치에는 노란 무우꽃같은게 융단처럼 깔려 있다. 현풍에 가까워지니 동쪽을 막고 선 비슬산이 보인다. 박대장님 말에 따르면 지난 토요일에도 진달래가 피지 않았었다며 오늘쯤은 아마도 장관을 이룰 것이라고 말한다. 지 지난 주 토요일 무박으로 갔다 꽃은 못 보고 주차장에서 돼지불고기만 불판에 해먹은 기억이다. 지난 겨울 많은 눈 때문인지 금년은 너무 늦어 달성군은 ``참꽃 없는 참꽃 축제(4/12-20)``가 되고 말았단다. 후미 가이드는 박대장에게 그 쪽으로 유인도 해 봤는데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고 듣지않아 그냥 화왕산으로 왔다고 산 초입에서 귀뜸해준다. 현풍휴게소에서 산행 준비차 잠깐 쉬고 (11:10-20) 대구를 뒤로 하고 경남 창녕에 들어서니 마늘밭이 유달리 많다. 요즘 강장제로 인기 상종가인 우리 고유의 양념이다. 이 곳의 특작물인 모양이다. IC를 빠져 나오니 쉽게 볼 수 있는 진홍색, 분홍, 백색 철쭉이 조화처럼 흐늘어지게 길가 화단에 피어있다. 솔터마을 아파트앞(창녕여중)에서 차를 세운다 (11:42) 겹벚꽃은 이제야 절정 남쪽 산자락은 암녹 소나무들 사이 사이로 연두색의 활엽수 연한 잎이 마치 꽃처럼 보인다. 매표소에 이른 시각이 11:50분. 왼쪽으로 간다는 도성암 이정표가 있고 전시대에는 수집한 수많은 산악회의 리본이 가득 들어 있다. 박새가 여기저기서 소프라노로 봄을 노래하고, 수량이 많아진 계곡에 물 흘러내리는 소리가 바리톤으로 받쳐준다. 탱자나무도 가시 위로 꽃을 하얗게 올려놓고 있다. 어릴 때 집 울타리에서 많이 보았던 건데 그 동안 탱자꽃은 망각의 수렁에 깊이 갇혀있었다. 양쪽 길가에는 벚나무가 꽃은 다 버리고 불그스런 가냘픈 꽃밭침만을 꽃처럼 달고 있다. 음식점 화왕산장 옆에 서 있는 겹벚나무는 이제야 겹겹의 진분홍 꽃을 다닥다닥 달고 있다. 송림 사이의 계곡이 자하골 산림욕장이란다. 계속 따라가면 마지막 환장고개를 지나 화왕산성 서문에 이른단다. 암릉을 따라서 공중화장실(12:07)에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능선을 타 주위 산세를 조망하면서 오르기로 했다. 자하당 정자에 이르니 (12:13) 올라온 계곡 사이로 평화스러운 창녕읍내가 V자로살포시 나타난다. 창녕읍이 계곡 사이로 계속 암릉이다. 봄볕이 따가워 힘이 훨씬 많이 든다. 일행 한 분이 바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며 화왕산이 불산이라서 그런단다. 화왕(火旺)의 의미가 ``불기운이 왕성하다``는 뜻이고 보면 그럴 듯 하다. 양 건너편 능선 아래로는 경사가 심한 바위다. 지나는 능선의 부드러운 바위와는 달리 수직 또는 비스듬히 절리(節理)가 되어 모두가 칼날 같고 각이 져 있다. 건들지 말라는 쪼다. 참나무 등 활엽 교목은 찾아보기 힘들고 침엽의 소나무만 서 있다. 바위들과 잘 어울릴 것 같아 소나무에 양보 하고 참나무는 다 피신 한 듯 싶다. 솜털 같이 하얀 꽃을 달고 있는 노린재 나무가 꽤 많이 눈에 들어온다. 꽃이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관목이다. 노린재 나무의 꽃 암릉 위로 또는 에움길을 따라 심심치는 않다. 조금이라도 위험스럽다 싶으면 스테인레스 쇠기둥에 두툼한 밧줄을 메어 놓아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창녕군에서 1,000원씩 입장료를 받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가? 박대장님은 군립공원에서 입장료 받는게 너무 이상하다고 목청을 올린다. 가다 쉬다를 여러 번. 능선의 첫 봉우리에 막 오르려는데 대장님이 셔터를 한 번 눌러준다. (12:45) 봉우리에 서니 멀리는 좀 흐리기는 해도 시야는 한층 넓어진다. 서쪽으로 창녕읍내와 반듯반듯한 논이 보이고 그 뒤로는 희미하게 영남지방의 젖줄인 낙동강이 야산과 숨바꼭질하며 북에서 남으로 허연 살을 보인다. 북쪽으로는 화왕산 정상이 지척으로 보이고 그 아래로 이색 목초지대다. 여지껏 오르면서 보와 온 소나무와 날을 세운 바위로 덮인 산사면(斜面)과는 전혀 다른 맛이다. 분화구처럼 깊게 패인 곳이 인공적으로 목장을 위해 목초지를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동쪽은 능선의 연속이다. 육산의 관룡산(739.7m)도 연장선상에 있다. 성산 일출봉 분화구 비슷한 화왕산 정상 화왕산 정상의 푹패인 억새 군락지 중간의 원은 용지 (龍池) 심호흡 한번 하고 한바퀴 빙 둘러보고 정상을 배경으로 디카에 한 컷 담았다. 다시 암릉을 따라 내려갔다 오르니 조망할 곳이 또 나오면서 정상이 더 넓게 잡히고 다시 따라가니 정식 초원에 이른다. 분화구 모습이 동서가 뚫린 말 안장처럼 생겼다. 북쪽(화왕산 정상)과 남쪽은 말등의 앞뒤고 서쪽이 좀 높은 왼발쪽, 동쪽이 좀 낮은 오른발쪽이라 치면 되겠다. 자연히 물은 동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이 안은 억새밭으로 가을과 초겨울에는 은빛 장관을 이룬단다. 3년 만에 한번씩 억새 태우기 축제를 거행 지난 2월 15일 정월 대보름을 맞아 쥐불 겸해서 불태워 밤중의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단다. 억새 밭이 5만 6,000평. 태운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V자 남쪽 사면에 주로 있는 싸리나무와 진달래가 잎순과 꽃순을 못 내는 걸 보면 화기(火氣)를 너무 받았나 보다. 억새는 타고 난 검은 밑동에서 새 순을 힘차게 밀어 올리고 있는데 헌 옷을 불로 없애 주어 좋을 것이다. 비가 많아 금년 억새는 제법 크게 자랄 것 같단다. 이 이색적인 지형과 억새가 등산객을 끄는 매력의 포인트. 물론 억새는 가을부터 초겨울이 하이라이트란다. 화산이 분출한 흔적이 없는 걸 보면 지하 깊은 곳에서 형성된 암반 덩어리가 융기, 연한 가운데 부위가 침식을 받아 분화구처럼 만들어진 거란다. 마치 주위를 조망하라고 있는 것처럼 높고 큰 바위가 여럿이 서 있는 배바위(742m)에 왔다. 뱃줄을 묶어 두기에 좋은 바위 같아서 배바위라는 이름은 지어 받았단다. 이 곳은 북쪽의 정상을 마주하는 남쪽의 카운터파트 봉우리. 동쪽에는 남북으로 이 초지와 바깥 경사면을 가르는 성벽이 V자로 되어있다. 중턱쯤에 누각 없는 동문, 그 아래 최저 지점에는 물이 빠져나가는 문인 것 같다. 산성의 벽은 최근에 많이 다져 놓은 모양이다. 곽재우와 화왕산성 화왕산성은 역사와 설화가 쉼 쉬고 있는 곳. 이 성은 가야나 신라시대 처음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조선 초기에 이미 폐성이 됐고 임진왜란 때서야 의미가 되살아 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 왜군이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도착 그 다음날 동래성을 함락하고 20일만인 5월 2일 서울에 입성한다. 선조는 그날 청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과 함께 의주로 피신을 간 상황이다. 32세이던 1585년 고시에 합격한 곽재우는 외갓집이자 고향인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왜군이 함안을 점령하고 전라도로 쳐 들어 갈 심산인 낙동강의 정암진(솥바위 나루터) 도하작전을 막아 패퇴시킨다. 빨간옷을 입고 싸웠다해서 홍의장군이란 별명이 여기서 붙는다. 진주성 싸움에서 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관군을 돕기도 했다. 화왕산성은 1597년 정유재란 때의 일이다. 일본이 명나라와 우리 나라에 대한 전후 협상이 잘 안되자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 그런 기미 때문에 1년간 의주로 피난갔다 돌아온 선조는 1596년 이 곳에도 산성을 쌓게 한다. 임진년에 함북 회령까지 밀고 올라 가 경성에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포로로 잡았던 가토 기요마시 (加藤淸正)가 정유재란의 선봉장이다. 곽의병장은 이곳에 내성을 쌓고 왜군과 맞서 싸운다. 전라도의 피해가 적었던 것도 곽재우의 역할 때문이란다. 관군과 모든 의병 중에서 제일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용담인 ``곽재우전``이 나올 정도였으니. 6.25때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불기가 왕성하다는 화왕산의 산성은 의병장 곽재우를 제일 먼저 생각케 하는 게 이 때문이다. 불안한 한반도 정세에서 전쟁이 나면 곽의병장 같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돈 있고 고위직의 인사들은 미국에 좀 살았다 싶으면 자식들이 미국국적을 취득 일반 서민은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다. 아마도 내 마음 깊은 곳에도 그들 처럼 기회가 주어지면 같은 생각이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처럼 곽 의병장의 구국의 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어 좋다. 조(曺)씨의 득성(得性) 설화도 흥미 끌어 이곳에는 또한 창녕조(曺)씨의 득성(得性)설화가 등산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 신라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婚期)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腹中)에 병(病)이 생겨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病)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丈夫)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龍)의 아들 옥결(玉 )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卿相)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子孫萬代) 번영(繁榮)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容貌)가 준수(俊秀)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李學士)가 이상히 여겨 왕(王)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姓)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下賜) 하였다고 한다. 계룡(繼龍)은 자라서 진평왕(眞平王)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창녕(昌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계룡(繼龍)의 후손 겸(謙)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겸(謙)은 신라 말(新羅末)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낸 흠(欽)의 아들로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혼인(婚姻)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지냈다.`` -- 인터넷에서-- 박혁거세 등 왕족에나 있을 법한 득성설화가 창녕조씨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시조(始祖)에 대한 이렇다 할 얘기를 못 들어 본 나는 우리 조상의 득성 과정은 어떤가 생각해 볼 기회가 됐다. 뿌리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다. 얼마나 자부심이 넘치는 창녕조씨일까. 동문 바로 아래에 1897년 세운 득성지지비(得性之地碑)가 있고 그 아래 제일 움푹한 늪지에 조씨 설화가 얽힌 용지(龍池) 셋이 나지막한 울타리를 원으로 둘러 놓았다. 진초록의 풀로 장식되어 있다. 뭘 발굴했는지 첫째와 둘째 연못 사이에는 사람 손으로 돌이 가지런히 사각으로 있다. 습지의 연구 대상인가 아니면 조씨의 시조 제단인가. 갖가지 풀 꽃이 초지 같은 분화구에 풀밖에 없는 이 곳에 조그만 노란 양지꽃이 발아래 지천으로 깔려 있다. 지난 대보름 쥐불은 이들에겐 별의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딸기 같은 잎을 하고 멀리는 못 달아나지만 열심히 기어다니고 있다. 진보라, 노랑, 백색의 제비꽃도 수시로 끼어 든다. 물론 어디서나 처럼 셋 중에는 보라색꽃이 제일 많다. 청아한 진보라의 애기붓꽃도 둘 셋씩 눈에 들어오고, 털보인 보라색의 조개나물도 간간이 눈에 띈다. 고비가 엄마 뱃속의 초기 태아처럼 힘차게 말려 나온다. 떡을 해먹으면 좋을 성 싶은 부드러운 쑥도 많아 등산 온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등산 겸 취도 캐려고 왔지요``라고 창녕 읍내에서 올라왔다는 장년 남자 둘 중 한 분이 말한다. 애기붓꽃 산 테두리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따라 정상( 756.6m)으로 가는 길도 양쪽이 장관이다. 이 산성을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이라고 말한단다. 왼쪽으로는 계속 목초지 마냥 한가롭고 마음 포근하고 오른쪽 아래는 암벽사이로 분홍진달래 끝물이 봄을 장식한다. 북쪽으로 제일 멀리 보이는 게 달성의 비슬산. 정상의 표지석 옆에서 사진 한 컷 위해 포즈를 취한 후 김밥을 꺼냈다. 아침도 부실한데다 1시 50분이나 됐으니 배 고플 수 밖에. 일행들은 모두 서문 노점쪽으로 내려 갔다. 서쪽은 성벽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데 입구에는 간이 노점들이 여럿이다. 일부 일행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 후 막걸리를 묵무침을 안주로 한잔씩 한 상태다. 배바위에서는 청색과 노란색의 지붕으로 보였던 것들이 와서 보니 탁자와 의자들이었다. 일요일이면 등산객이 엄청나게 몰려 들어 동문에서도 막걸리, 묵무침, 라면 등을 판단다. 그래서 먹을 것을 가져오지 않아도 허기를 면할 수 있고 기분도 낼 수 있는 곳이다. 하산은 자하골로 사실 환장고개로 올라오면서 말 그대로 내장을 다 바꾸어 놓고[換腸] 싶었는데 암릉으로 오는 바람에 못했다. 보통 숨 넘어 갈 정도로 경사가 급한 곳을 깔딱고개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곳은 좀 색다른 말을 찾다 없어 전라도 표준말인 ``환장``이라는 말을 수입해 붙인 듯 하다. 환장고개를 따라 자하골로 발을 내 디뎠다. (2:20) 561년 진흥왕이 이 곳에 세운 척경비(拓境碑)는 1914년 2월 창녕초등하교 학생이 창녕읍 말흘리 화왕산 기슭에 소풍갔다가 목마산성 서쪽기슭의 밭 속에 있던 것을 발견하여 교사에게 알려오게 된다. 일본교장의 보고에 의하여 동경제대 도리이(鳥居龍藏)가 신라 비석임을 확인하고 학계에 보고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그런 횡재를 할 수 없나 하는 생각으로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초등학생에 어떻게 그런 큰 일이 벌어졌나. 더 정확한 경위가 나의 궁금증을 더 해 준다. 하산 길은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스틱을 빼 들었다. 나누어준 한 장짜리 안내지 만화에는 스틱을 짚으면 체중의 30%를 스틱이 받기 때문에 그만큼 무릎에 힘이 덜 쏠린다고 해 놓았다. 내려오다 보니 이 높은 곳에 꽃을 핀 복숭아 나무가 두 어 군데서 보인다. 좌우에는 송림이다. 풀과 나무에 눈을 맞추며 내려오다 제일 연세 많으신 70이 넘으신 어르신네와 앉아 참외도 깍았다. 중턱 아래로 내려오니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물속에 발도 담그고 싶지만 신발, 양말 벗는 게 거추장스러워 포기. 사진을 찍는 게 취미인 한 일행은 야생화 중 애기붓꽃 하나 겨우 건졌다며 아쉬워 한다. 현호색을 배바위 옆에서 봤다는데 나는 놓쳤다. 공원에만 다니다 처음 와 봤는데 새로운게 잡히지 않는단다. 거의 다 내려와 길옆에 조그만 하얀 꽃에 점이 있는 풀을 보고 다화개별꽃이라고 알려 준다. 꽃이 1등성 별 같다. 마지막 얻은 소득이다. 내려오다 보니 오를 때 갈림지점인 공중 화장실에 다다른다. (3:10) 주차장에 내려오니 막걸리에 소주를 기울이고 있다. 국밥을 시켜 드는 일행도 많다. 나도 한 그릇 시켜 먹으며 남은 막걸리 한잔에 소주 두 어 잔 하니 횟배가 동해서 좋다. 6명은 관룡산 까지 다녀 왔다고 한다. 초행인 나로서는 화왕산이면 족하다. 쉽게 볼 수 있는 산의 모습이 아니라서 거기에 더 머물고 싶었는데… 네시 예정에 5분 일찍 출발, 구름도 쉬어 간다는 추풍령 휴게소에서 잠깐 들렀다 (5:30-50) 양재역에 도착하니 8시. 4시간 걸렸으니 참 빨리도 왔다. 길을 잘 뚫어 논 덕택이다. 산행후 생각 화왕산은 정상이 정말 재미있는 산이었다. 야생화도 많아 평소 눈을 많이 맞춘 것들은 서로가 매우 반가웠다. 여러가지 조상의 얼이 서린 곳이어서도 좋았다. 화왕산성 외에도 말을 방목하기 위한 것인지 도성암 북쪽 기슭에는 새끼성인 목마(牧馬)산성도 있고, 창녕비가 말흘리 목마산성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데 현장을 못 지나온 게 아쉽다. 또한 도성암으로 내려오다 보면 하늘 높이 서 있는 침엽수림이 빼 놓을 수 없는 산림욕장이라는데... 항상 산행 후에는 아쉬움이 더 많다. 이제는 신록의 달 5월로 접어 든다. 더위가 심해질 것이고 완전히 녹음으로 뒤덮일 것이다. 한번 더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오는 달을 맞아야 겠다. 끝 <채희묵 chaehmo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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