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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266> ‘기생수’





기생수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다. 지구 상에 돌연 등장한 기생 생물들이 사람의 뇌를 파먹고, 수많은 이들이 도륙을 당한다. 주인공인 신이치 역시 오른손에 기생수가 파고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는 않은 채 기생 생물 ‘오른손이’와 공생(共生)하게 된다. 인간을 멸종시키는 외계 생명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은 되려 내게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가장 무서운 기생수는 지금 세상에도 실제로 존재하니까.

한 사람에 들러붙은 또 다른 사람. 둘 간의 관계가 매우 비대칭 적일 때 기생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대학교수가 자신의 석, 박사과정들을 시켜 본인의 논문을 쓰게 하거나 교수만 저자로 등록된 책을 집필하게끔 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아이들의 학위와 미래를 담보로 대가없는 노동을 시키는 것이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조교’라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배우는 학생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분과 합법적인 연구 보조활동을 시키려면 적당한 직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교들은 교수가 시키면 코끼리도 잘라서 냉장고에 넣어야 할 정도로 절대 을(乙)이다. 그들의 지도교수는 주군임과 동시에 ‘기생수’다. 어디 이뿐이랴. 상당수의 비도덕적인 갑들이 을에게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흔해 놀랍지도 않다. 물론 ‘기생수’에 끌려 다니는 사람 역시 별 다를 것 없는 기생수인 경우도 있다. 서로를 간 보며 빼먹을 궁리만 하는 관계, 그러나 기생수는 곧 기생수를 알아 본다. 흡수할 자양분이 없으니 관계가 지속될 리 없다.

역사 속에도 기생수는 존재했다. 또 기생수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사례도 있다. 과거 중세 일본에서는 몰락한 귀족들이 벼락 출세한 무사들에게 ‘용돈’을 받아 쓰곤 했다. 16세기 말이 되면 그들의 군주인 천황(天皇)조차도 궁궐 조성금이나 제사에 필요한 비용 등을 빌미로 무사들에게 돈을 부탁했다. 사무라이들에게는 ‘명예’가 필요했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이론적으로 보강할 만한 전통적 권위와 문화의 힘이 절실했다. 과거 일본의 몰락 귀족과 군주는 신흥 지배자들에게 명예를 제공하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리고 관위(官位)를 내리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농민 출신으로 최고 지배자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귀족들과 천황가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도요토미’(豊臣)라는 새로운 성씨를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된 관직에 오를 수 없는 히데요시는 기생수들의 의존증을 적절히 이용해 ‘패러다임 시프트’를 감행한 셈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판에도 기생수가 있단다. 꼭 15~16세기 일본처럼 몰락한 구(舊) 정치인들이 ‘킹메이커’를 만나게 해 주겠다며 사람들에게 용돈을 바치기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잠깐 동안의 화려한 경력을 빌미로 신흥 부유층들에게 ‘상납’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기득권층과 교류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다. 누구나 상승욕구를 갖고 있는 인간인지라 자신의 핸디캡을 어떻게 해서든 메워보려고 시도하게 마련이다. 스스로를 콘텐츠가 아니라 상류층과의 교분으로 지위를 업그레이드하려는 사람들은 충분히 매력을 느낄 법하다.

한국은 유난히 인간관계의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이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누군가와 소통하는 데에도 겹겹이 진입장벽이 형성되어 있기에 그 과정에서 막을 치고 뒷돈이나 거래를 요구하는 사람이 많은 게 사실이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 역시 일조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교환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곳 어디에나 기생수가 득시글댄다. 괜찮겠지 또는 어쩔수 없다는 생각으로 내버려두기에는 분명 위험하지만 불합리한 관계를 고발하자니 그것 역시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갑이 달리 갑인가. 을이 최후의 수단이라며 극단적인 선택을 해도 그때뿐, 묻히기 마련이고. 한 전직 정치인은 이용만 당해 억울하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아직까지 그의 억울함은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변에도 기생수가 있었다. 빈 껍데기만 남을때까지 믿고 따르던, 실제로는 별 힘도 없었던 인물이란다. 믿고 따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감별해내는 법을 연마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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