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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싸운다’…국민총동원령의 명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풍전등화(風前燈火). 혁명 4주년을 지나는 프랑스의 사정이 딱 그랬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1789.7.14)으로 시작된 혁명은 안팎의 도전을 받았다. 국경은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한 외국 군대의 침입에 시달렸다. 내부에서는 정파 간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지휘관들이 외국으로 망명하는 통에 군대는 무너진 상태였다. 특히 8월 들어 혁명의용군이 잇따라 패배하며 위기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우선 방데의 농민반란군이 기세를 올렸다. 혁명의용군은 1792년에는 외국군의 침입을 용케 막아냈지만 1793년 들어서는 외국 군대와 전투에서 졌다.

1792년까지만 해도 프랑스에 침입한 군대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두 나라 뿐이었으나 루이 16세를 처형한 이후, 거의 모든 유럽국가가 프랑스를 적으로 삼았다(1차 대 프랑스 동맹, 참가국=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 네덜란드·스페인·포르투갈·교황령·나폴리·피에몬테·사르데냐). 프랑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프랑스는 망하지 않았다. ‘루이 16세 부부에게 위해를 가하면 파리를 괴멸시킬 것’이라고 협박하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침공군은 파리 외곽에도 못 왔다.

나중에는 오히려 그들이 프랑스에 당했다. 방데 지방을 비롯한 지방 각지에서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왕당파가 준동했어도 혁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두 가지 장치가 작동한 덕분이다. 첫째는 반(反) 혁명세력 소탕. ‘공포 정치’의 독재 아래 왕당파와 귀족 등 국왕에게 온정적이거나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을 낱낱이 찾아내고 단두대에 올렸다. 두 번째는 국민 총동원령(Levee en masse). 1793년 8월 23일 발동된 국민 총동원령은 한 마디로 모든 국민이 함께 싸운다는 것. 수학자이며 공병장교 출신으로 국민공회 의원이던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당시 40세)가 틀을 짰다.

‘젊은이들은 전장에서 싸우고 나이 든 남자는 무기와 마차를 만들며 여자는 병원에서 일한다. 아이들도 아마포(섬유의 일종)를 두들기고 노인은 공공장소에서 전의를 북돋는 연설을 해야 한다’, ‘말을 비롯한 식량, 모든 물자는 군이 우선 징발하고 국가 소유 건물은 병영으로 바뀐다. 사람마다 지하실의 먼지를 털어내 초석(화약의 원료)을 거둔다.’ 한마디로 총력전에 나서겠다는 동원령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역사상 최초의 국민군인 80만 명 혁명군이 조직됐다.



카르노는 대병력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물론 봉화와 기구를 이용한 명령전달 체계를 구축했다. 나라 전체의 생필품 생산과 조달도 그의 책임이었다. 그를 근대적 국민경제 운용의 창시자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참여한 프랑스군은 국왕의 근위병과 용병이 주축인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카르노는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발, 제네바에 잠시 망명하며 미적분학과 기하학에 대한 저술도 펴냈다. 결국 나폴레옹에 의해 중용된 그는 워털루 전투 패배 뒤에도 최후 항전을 주장하다 왕정복고 후 추방돼 1823년 타향인 독일에서 생애를 마쳤어도 ‘행정의 귀재’, ‘승리의 조직자’라는 명성으로 기억된다. *

위기의 순간에 카르노가 만든 ‘국민 총동원령’과 ‘프랑스 혁명군’은 오늘날까지 그 영향이 살아있다. 모든 국민이 병역의 의무를 지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의 원형이 바로 프랑스의 1793년 국민 총동원령이니까. 국민개병제 자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비 민주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이라는 비판과 ‘국민이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다할 때만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으며 국민 총동원령은 그 치열한 사례’라는 긍정론이 상존한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분명한 것은 두 가지다. 프랑스는 이 제도로 성공을 거뒀고 다른 나라들이 프랑스를 모방하며 세계로 퍼졌다는 사실이다.

먼저 프랑스를 보자. 프랑스 국민공회는 1793년 1월 루이 16세 처형 이후 외국군의 침공 움직임이 노골화하자 3월에 ‘30만 동원령’을 내렸으나 실패했었다. 병력이 모이지 않았다. 반면 5개월 지나 공표한 ‘국민 총동원령’은 대성공을 거뒀다. 동원령 선포 1년 뒤에는 무려 150만 명의 장정(병역 자원)이 입대를 기다렸다. 볼과 5개월 사이에 실패와 성공이 엇갈린 이유는 ‘30만 동원령’은 선별 징집이었고 총동원령은 ‘무차별 징집’이었기 때문이다. 의무를 수행하는 데 차등을 두지 않았기에 성공한 셈이다.





곧 망할 것 같았던 프랑스가 대병력을 일으키고 무장하는 광경을 목격한 유럽 국가들은 충격에 빠졌던 것 같다. 프로이센의 군인이며 전쟁 이론가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 이렇게 썼다. ‘지금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큰 군대가 1793년 출현했다. 전쟁은 갑자기 전 국민의 사업이 됐다…(중략)…전쟁은 먼저 프랑스에서, 이어서 다른 나라에서도 온 국민의 일이 되었으며 전쟁의 성질도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국왕과 군대의 관심사였던 전쟁이 프랑스의 총동원령을 계기로 전국민적 관심사가 됐으며, 막강해진 프랑스군에게 존망을 위협받게 된 다른 나라들도 국민 총동원에 나서게 됐다는 얘기다.

국민 총동원령으로 태어난 프랑스의 대병력에 놀란 각국은 똑같은 징병령을 내렸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뒤 영토와 인구를 절반가량 잃었지만 ‘프로이센판 총동원령’을 내려 이전보다 병력 규모를 두 배로 키웠다. 프로이센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그렇게 했다. 전쟁은 총력전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약 100년간 크리미아 전쟁 외에는 이렇다 할 전쟁이 없었던 유럽의 열강들은 전쟁 대신 다른 곳에 총력을 기울였다. 에릭 홉스 봄의 ‘제국의 시대’에 따르면 열강은 약소국의 착취하는 경쟁을 펼치고 민족제국주의와 파시즘이 생성되면서 1·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전쟁의 시대’로 들어갔다.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낸 전쟁사가 고 존 키컨 역시 ‘2차 세계대전사’에서 세계대전의 기원을 국민이 모두 나서 총력전을 치른 프랑스에서 찾았다. 과연 오늘날 전쟁의 원흉은 프랑스의 국가 총동원령일까. 답보다 확실한 게 있다. 총력전이 옳든 그르든 현실이며 제대로 활용해야만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키건의 ‘’2차세계대전사‘를 번역한 류한수 상명대 교수(역사콘텐츠학과)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에서 총력전 체제를 제대로 활용한 나라들이 이겼다.

1차 대전과 전후 궁핍을 병적으로 증오했던 히틀러의 고집 때문에 독일은 생산력을 군사 부분에 극대화하지 못한 반면 미국은 달랐다. 전시 생산에 돌입한 이후 승용차 생산량은 달랑 37대였다는 점, 무려 2,000만 명의 여성이 전쟁터로 나간 남성 노동자를 대신에 대거 생산직을 맡았던 점은 미국이 얼마나 총력전을 펼쳤는가를 말해준다. 소련도 스탈린그라드 동쪽으로 급히 옮긴 군수공장의 3분의 2를 변변한 건물도 없는 노천에서 가동하며 무기를 만들었다. 국민은 물론 생산 역량 총동원이 승패를 갈랐다는 점은 대혁명기 프랑스의 국민 총동원령과 같은 맥락이다.

프랑스 혁명 정신을 계승한다면서도 황제 자리를 차지하며 프랑스 혁명군을 대육군(大陸軍·La Grande Armee)으로 개편, 유럽을 뒤흔든 나폴레옹도 ‘군대는 밥으로 행진하는 생물’이라고 말했다. 국민이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의 극대치가 군대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카르노나 나폴레옹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진리를 치열하게 가다듬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2,400년여 전에 투키디데스는 ‘필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자본의 힘이다. 약탈한 자본이 아니라 축적된 자본의 힘’이라고 말했으니까.



전쟁이란 망하려고 작정한 경우가 아니라면 축적된 자본의 힘을 가진 강자가 일으킨다. 불시에 찾아올지도 모를 전쟁에서 총력전을 펼치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징병을 추구해야겠지만 상책은 전쟁을 피하는 데 있다. 축적된 자본, 경제개발의 성과를 한순간에 날릴 수 있는 전쟁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돈뿐 아니다. 인명 손실은 더욱 감당하기 어렵다. 1789년부터 1815년까지 전쟁을 통해 130만~150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을 잃어 청년 인구 상실 폭이 유럽에서 가장 컸던 프랑스는 이후 경제와 산업 생산의 선두 자리에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열역학 제2 법칙’의 근거인 ‘카르노 사이클’을 발견한 물리학자 니콜라 카르노가 그의 아들, 1887년 제3공화정의 대통령에 당선돼 7년 후 외국인에게 암살된 마리 카르노가 손자다. 카르노 집안은 3대에 걸쳐 프랑스인의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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