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四面楚歌)’. 요즘 이동통신사들이 처한 상황이다. 통신시장 포화와 요금할인율 인상으로 가뜩이나 성장률이 둔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영활동을 위축시키는 이슈가 끊이질 않아서다. 지난 12일 대법원이 통신요금 원가정보를 공개하고 판결하면서 운신의 폭이 좁아진 상태에서 최근 국회에서 통신요금 개편 과정에 시민·소비자단체도 참여하도록 하는 법안까지 발의됐다.
무엇보다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에서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고 있는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참여연대가 제기한 통신요금 원가정보 공개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진데 이어 요금 결정에까지 시민단체가 관여하게 될 경우 통신비 인하 문제에 매몰되면서 미래 설비투자 등 장기계획을 세우는데 제약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이 실질적인 통신비 인하 혜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민단체를 끌여들여 이통사들의 팔목만 비틀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가격·서비스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규제부터 풀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15일 ICT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회에서 잇따라 발의되고 있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들은 시민·소비자단체가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대로 통신비 원가를 공개하고 요금 변경시 시민단체가 참여한 심사위원회의 인가를 받게 되면 통신사의 핵심 경영에 시민단체가 사실상 참여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정부는 통신요금 인가 업무를 수행할 때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자문위원회는 운영하지만 인가 권한을 갖는 심사위는 따로 두지 않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통신 소비자들의 편익을 강조하는 시민단체의 속성상 요금 인하만 줄기차게 요구할 것”이라며 “통신비 인하로 수익성이 악화돼 투자 여력이 부족해져 경영에 실패하면 그 책임을 시민단체가 질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같은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을 때도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검토보고서에선 “(정부의) 인가 권한을 별도의 심사위원회를 통하도록 할 경우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고 인가의 법적 성격이 모호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통신비 인하가 시장의 자율 경쟁을 통해서가 아닌 정부와 시민단체의 압박 속에서 추진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경협 의원실 관계자는 “대법원의 원가공개 판결을 계기로 여당 일각에서 더 적극적으로 통신요금 인하에 대한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월 1만1,000원의 통신 기본료를 폐지하는 공약을 내걸었으나 사실상 폐기된 상태였다. 기본료 폐지의 대안으로 제시된 보편요금제(월 2만원대 요금제에 음성 200분·데이터 1GB 제공) 역시 가계통신비 정책협의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해 도입 가능성이 낮다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과 여당의 관련 법안 발의로 통신 기본료 폐지 혹은 보편요금제 추진이 다시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오는 6월 정부에서 보편요금제 내용을 담은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하면 관련 개정안들도 병합 심사 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이미 20대 국회엔 기본료 폐지와 보편요금제 도입 등을 담은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들이 여러 건 계류돼 있다.
반면 이통사들은 인가제 폐지·신고제 완화 등 규제 완화가 요금 경쟁을 통한 통신비 인하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요금 인가제는 시장 점유율 등이 높은 기간통신사업자(SK텔레콤)가 이용요금 등에 대한 이용약관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의 인가를 받도록 한 제도다. KT와 LG유플러스는 인가가 아닌 신고제를 적용받는다. 지난 2016년 정부에서 요금 경쟁 활성화를 위해 인가제를 유보신고제로 완화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묻혔다. /권경원기자 nahe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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