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스승은 애제자를 이길 수 있을까.’
나집 라작(64) 말레이시아 총리와 그의 정치적 스승 마하티르 모하맛(92) 전 총리가 맞붙는 말레이시아 총선이 9일 치러지는 가운데 독립 후 61년 만에 처음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날 가능성에 국제사회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나집 총리와 여당인 국민전선(BN)이 보조금 정책, 선거구 조정 등 온갖 꼼수를 썼지만 국영투자기업인 1MDB 관련 부패 스캔들과 서민 물가 부담으로 야당연합인 희망연대(PH)가 막판 지지율을 역전시킨 상황에서 총선이 치러지기 때문이다. 다만 누가 정권을 잡든 정치가 경제불안 요인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돼 이번 총선은 혼란의 시작일 뿐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8일 외신들에 따르면 선거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PH의 지지세가 상승가도를 타고 있다. 지난 6일 휴일을 맞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지지자들의 ‘개혁’ 함성 속에 PH의 선거유세가 자정까지 이어졌다. 열광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마하티르 전 총리는 “정권교체를 원하는 물결이 지금보다 더 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며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의 힘이 있다면 PH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말레이시아 여론조사기관 메르데카센터가 1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PH는 BN을 4%포인트 차로 따돌리며 막판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PH가 승리하면 22년간 장기 집권했던 92세의 마하티르 전 총리가 다시 권력의 정점에 설 것으로 전망된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1981년 총리에 오른 후 한국과 일본의 성공을 배우자는 ‘동방정책’을 내세워 제조업 지원, 수출주도 성장으로 말레이시아 경제를 살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2003년 정계 은퇴 선언 이후에도 나집 총리를 강력히 지지해 2009년 총리 자리에 앉히는 등 막후 실세로 활동했다.
선거운동이 시작됐던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살아 있는 권력’인 나집 총리의 승리를 의심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나집 총리는 3월 여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재편하고 ‘가짜뉴스 처벌법’을 만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보도만 나가도록 손을 썼다. 또 저소득층 지원금을 연 1,200링깃(약 33만원)에서 2,000링깃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하는 등 3선 연임을 위한 선심성 정책을 내놓았다.
나집 총리의 각종 ‘꼼수’에도 PH의 인기가 오른 데는 나집 총리가 연루된 부패 의혹의 영향이 크다. 나집 총리는 1MDB에서 7억달러(약 7,540억원)를 개인 비자금으로 빼돌렸다는 의혹으로 각국에서 소송이 걸려 있다. 여기에 2015년 도입된 6%의 소비세와 쌀·석유 보조금 폐지로 서민들의 고충이 커지면서 BN의 핵심 지지층인 말레이계에서 이탈 움직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나집 총리의 친중정책도 소수파 중국계의 영향력 강화를 우려하는 말레이계의 표심을 흔드는 요인이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부패근절, 소비세 폐지, 중국 투자유치 재검토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총선 하루 전까지도 선거 결과는 안갯속이지만 어떤 당이 이기든 혼란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단 전문가들은 말레이 선거구가 워낙 여당에 유리하게 짜여 지지율이 야당에 비해 낮아도 나집 총리가 결국 3연임에 성공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PH의 선전으로 BN이 지난 총선 결과인 133석(총 222석)보다 못한 의석 수에 머문다면 나집 총리의 정권 기반이 취약해지면서 그의 도덕성 문제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PH가 의외의 승리를 거두더라도 마하티르 전 총리가 ‘앙숙’인 야권을 효율적으로 이끌지는 미지수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총선에서 승리하면 야권의 실질적 지도자인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에게 총리직을 내놓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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