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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융합 시대 내다본 '협업의 거장'...예술에 기술을 품다

<18>백남준과 그의 조수들

일찍이 '협력의 가치' 알았던 백남준

내것 고집 않고 인재들과 작품 활동

기본 설계만 주고 세부적인 것은 맡겨

1991년작 '다윈' 게린과 함께 제작

로봇·장비개발은 아베 슈야와 공조

세기말도 유일한 한국인 이정성 손 거쳐

백남준 10주기 맞아 패밀리 뭉치기도

백남준(왼쪽)이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전을 준비하며 엔지니어 이정성에게 설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제공=이정성




백남준의 1991년작 ‘다윈’. 백남준의 주도 하에 조수 폴 게린이 내부 영상을 편집하고, 마크 파스팔이 로봇의 외양을 디자인해 제작됐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백남준아트센터가 최근 새 특별전 ‘생태감각’을 개막했다. 지구 생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간 행위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자연과의 공생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이야기하는 이 전시는 백남준의 영상작품 ‘다윈’으로 시작된다. 원숭이·코끼리·거북·도마뱀 같은 동물들과 동물원을 구경하는 사람들, 꽃의 이미지가 뒤섞인 29분짜리 영상이다.

백남준의 1991년작 ‘다윈’에 사용된 영상의 원본(비디오 소스)으로 추정되는데, 백남준아트센터가 소장한 비디오아카이브 연구를 통해 발굴돼 지난 2012년 백남준 탄생 80주년 전시 때 처음 공개된 적 있다. 전시장에는 이 ‘다윈’ 영상의 작가명에 백남준과 폴 게린(Paul Garrin)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다. 비디오조각의 형태로 최종 완성된 ‘다윈’은 백남준의 작품이지만, 그 원천 재료 격으로 제작하고 편집한 영상은 백남준과 게린이 함께 만들었기 때문이다.

백남준과 폴 게린이 함께 제작한 ‘다윈’의 29분짜리 영상 중 한 장면. 이 영상은 백남준의 1991년작 ‘다윈’에 사용됐다.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일찍이 협력과 융합의 시대를 내다본 선구안의 작가였다. 당시 경기고와 도쿄대를 졸업한 ‘수재’인데다 음악과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뛰어나 ‘천재’ 소리를 듣는 백남준이었지만 혼자 ‘내 것’을 고집하기보다는 유능한 인재와 힘을 합치는 지혜를 발휘할 줄 알았다. 예술에 기술을 더한 새로운 장르의 개척은 그래서 가능했다.

백남준은 1960년대 초만 해도 최첨단 분야였던 전자기술을 독학으로 익혔다. ‘자꾸만 읽고 싶어지는 다른 책들 죄다 치워버리고 전자분야 책만 남겨둔 채’ 독하게 매달렸다. 상당한 수준에 오른 전자분야 지식으로 1963년 파르나스 갤러리의 첫 개인전에서 13대의 텔레비전을 이용한 최초의 ‘전자예술’을 보여준 백남준이었지만, 이후 일본으로 간 그는 엔지니어 슈야 아베와 협업했다. 화가 백남준의 ‘붓’에 해당하는 영상 편집기인 ‘비디오 신디사이저’와 초창기 로봇은 백남준과 아베가 손을 맞잡았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백남준은 누구나 피아노로 음악을 연주하듯 비디오 신디사이저로 영상을 그려가게 만들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자신이 구상하는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베를 가리켜 백남준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의사”라 했다. 아베는 백남준이 일본으로 간 1963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함께 일했다. 백남준은 아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마음 심(心) 자를 2획씩 2장에 나눠 그린 드로잉을 선물했다. 두 장을 합쳐야 하나의 마음이 완성되는 작품은 친구이자 기술적 동료였던 백남준과 아베의 관계를 상징한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과 아베가 주고받은 편지 97통을 번역해 ‘백-아베 서신집’을 올해 초 출간했다.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의 회고전 ‘비디오 때, 비디오 땅’에서 작품설치를 맡은 백남준의 조수들 마크 파스팔(오른쪽부터), 이정성, 존 호프만, 블레어 서먼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이정성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간 백남준이 본격적으로 ‘비디오아트’를 전개하면서 1970~80년대 그의 뉴욕 스튜디오에는 늘 함께 일하는 제자 겸 조수인 공동작업자들이 있었다. ‘다윈’을 함께 촬영하고 편집한 폴 게린도 그 중 하나였다. 게린은 1981~1997년 백남준 스튜디오에서 비디오 편집을 주로 맡았지만 그 자신도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작가이기도 했다. 반전(反戰)·평화주의자였던 게린은 백남준이 리옹비엔날레에 참여하게되자 현지에 동행했다. 개막행사가 시작됐는데 게린만 보이지 않았다. 느닷없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 ‘핵실험 반대’ 현수막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게린은 인터넷 사용권의 ‘공유’ 개념을 일찍이 주장해 1990년대부터 직접 ‘스트릿뷰’를 촬영해 공개한 ‘깨어있는’ 작가였다. 하지만 도발적 행동으로 미국 정부와 날을 세웠던 탓에 작업실로 FBI가 찾아온 적도 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게린은 비행기를 타면 물조차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백남준은 게린과 협업하면서도 그가 작가로서 성장할 수 있게끔 도왔다. 백남준은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 ‘인포아트(Info Art)’의 작가 겸 디렉터를 맡으면서 게린을 참여작가로 추천했다. 백남준은 게린에게 기본적인 설계안만 주었을 뿐 세부적인 것은 ‘믿고 맡겼다’. 백남준은 “알아서, 뭐든 재미있게 만들어봐. 다만 조금 다르게”라는 말을 즐겨썼다.

백남준 스튜디오 출신으로 가장 유명해진 작가는 빌 비올라가 대표적이다. 비올라는 대학 졸업 후 뉴욕의 에버슨미술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1974년 이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개인전이 열렸는데, 비올라는 당시 작품 설치를 도왔던 인연으로 백남준과 교류했다.

일본인 공학자 아베와 더불어 백남준의 ‘양손’ 중 하나인 엔지니어 이정성은 스튜디오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이정성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설치작품 ‘다다익선’을 계기로 1988년부터 백남준과 함께 일했다. 백남준 자신조차 장담할 수 없었던 1,003대의 텔레비전 모니터를 쌓아올리고, 만들어둔 영상이 정상적으로 고르게 작동할 수 있게 한 것은 이정성의 공로가 컸다. 이후 백남준이 전개한 대규모 비디오월(텔레비전 벽화) 제작과 설치에는 늘 이정성이 함께 했다. 최근 뉴욕 휘트니미술관이 복원과 전시를 끝낸 ‘세기말’ 등의 대표작이 이정성의 손끝을 거쳐 갔다. 백남준은 작품 계획을 드로잉으로 그려 이정성에게 설치를 당부했고 향후 수리와 복원에 관한 위임장도 적어주곤 했다. 위임하되 존중했다.

가끔 백남준은 ‘알아서 만들어보라’는 듯 뭉뚱그려 작품 계획을 얘기했는데 이에 대한 엔지니어나 조수들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듣곤 했다. 이를테면 1993년작 ‘거북선’을 두고 이정성이 “거북선에 거북이를 붙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그거 좋다”고 맞장구 쳐 현지에서 거북 박제를 구해 작품에 붙인 경우다. 백남준이 작가적 소신이 분명했음에도 전자제품의 구동원리에 의해 발열, 환기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조수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이는 백남준의 성격이자 작품의 특징이다. 백남준은 상황에 맞게 작품 구상을 변화시키는 융통성과 순발력, 유연성을 가진 작가였다. 작품 복원도 이 같은 맥락에서 ‘그 시기에 활용할 수 있는 최신의 기술을 적극 적용하라’고 했다.

1992년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대형 비디오월 작품 ‘세기말’을 설치중인 백남준(오른쪽)과 엔지니어 이정성. /사진제공=이정성


백남준이 1988년 이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칼솔웨이 갤러리와 함께 작업하면서는 비디오 조각 설치 전문가 마크 파스발의 활약이 컸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제작된 일명 ‘TV로봇’의 대부분은 그가 협업했다. 파스팔은 디자인을 전공해 미적 감각이 특히 탁월했다. 파스팔과 함께 만든 ‘TV로봇’은 개인이 소장하기도 좋은 작품들이라 제법 잘 팔렸고, 전성기의 백남준이 대규모 위성쇼와 대형 비디오월 작품을 위해 쓴 막대한 작업비를 충당해줬다. 신시내티대학 교수인 파스팔은 백남준 작품의 카탈로그 레조네(전작도록)이 없다는 점을 우려해 자신이 제작에 관여해 칼솔웨이 갤러리에서 만든 500여점의 작품목록을 정리했다.

백남준 작업실의 초창기 멤버인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존 호프만은 가장 나중까지 백남준과 함께 했고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백남준의 조카이자 저작권 상속자 켄 하쿠다의 백남준재단 일을 돕고 있다. 그랜 다우닝은 솜씨좋은 작가였으나 60㎝ 안팎의 아기자기한 소형 작품만 제작했을 뿐 대형 작품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블레어 서먼은 지금 뉴욕에서도 ‘잘 나가는’ 작가다. 백남준 작품 중에서 오토바이와 관련된 작품을 그가 만들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시장’의 기본 드로잉도 그가 그렸다.

독일 뒤셀도르프 출신의 작가 요한 사와카는 백남준의 일을 돕다가 자기 작업은 포기하다시피 했고 지금은 독일에서 백남준 작품의 수리·복원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노만 발라드는 백남준이 비디오 작업 이후 말년에 심취했던 레이저 분야를 도맡았다. 이들 대부분은 지난 1995년 광주비엔날레 때 백남준의 작품 설치를 위해 한국에 총출동 했다. 이후 백남준 10주기를 맞아 기획된 2016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심포지엄을 위해 20여 년만에 다시 뭉쳤다. 이들은 서로를 ‘백남준 패밀리’라 부른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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