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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260년 몽골군 아인 잘루트 전투 패배

몽골의 서진 첫 제동





1260년 9월3일 새벽 아인 잘루트(Ain Jalut). 이집트 맘루크 군대 2만명 앞에 몽골군이 나타났다. 예루살렘 북부 하이파 부근인 이곳에 도달한 몽골 군대의 병력도 2만. 무슬림 세력을 치기 위한 일부 십자군들도 몽골 편에 섰다.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 부근 세력 구도는 무슬림과 십자군이 세운 4개 소국, 아르메니아 기독교, 노예 병사들이 권력을 잡은 이집트 등 4파 전 양상. 중동을 거의 석권한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무슬림 군주들은 대부분 도망치거나 몽골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단 하나 맘루크만 몽골에 맞섰다.

‘저항할 경우 가장 끔찍하게 벌하겠다’는 홀라구에 협박에 맘루크조의 ‘쿠투즈’는 몽골 사신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매달았다. 십자군이 세운 2개 기독교 소국들은 홀라구의 분노에 놀라 스스로 몽골군에 들어가거나 길을 알려줬다. 새벽부터 시작된 2만 대 2만의 전투의 초반 기세는 몽골군 우세. 가볍게 이길 것 같았다. 몽골 기병들은 맘루크 본진에 깊숙이 들어왔으나 함정이었다. 좌익과 우익이 몽골군을 짓눌렀다. 본진도 방향을 돌려 세 방향에서 몽골군을 되받아쳤다. 한낮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몽골군은 크게 깨졌다.



가는 곳에 정복만 있으며 어떤 군대도 대적할 수 없다고 알려진 몽골군의 천하무적 신화가 이때 무너졌다. 맘루크군은 몽골군을 유프라테스강 유역까지 쫓았다. 몽골군이 패했다는 소식은 중동 지역에 퍼지고 몽골 협력자에 대한 복수극이 일어났다. 관망하던 다른 2개 기독교 소국들은 재빨리 입장을 바꿔 몽골군을 추격하는 맘루크군에 길을 터주고 물자를 내줬다. 결국 몽골군은 재침공 노력에도 이집트에 발을 딛지 못했다. 유럽 각국은 몽골에 대한 두려움을 떨쳤다.

우려도 사라졌다. 아프리카 북부를 석권한 몽골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유럽에 침입할 것이라던 가능성이 없어진 것. 이집트는 안전한 장소로 인식되며 문인과 학자들이 몰려들고 이슬람 세계의 중심 위치를 다졌다. 시리아에 산재했던 소규모 기독교 왕국도 이 전투 이후 세력이 강해진 무슬림에 의해 쫓겨났다. 이슬람 종교와 문화는 몽골과 기독교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을 구가했다. 몽골은 이 전투를 국지전으로 여겼으나 서진은 분명히 멈췄다. 흥미로운 점은 이 지역의 상징성.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싸움인 메기도 전투(기원전 1457년)와 요한계시록(16장 16절)에 인류 최후 전쟁터로 예고된 아마겟돈이 바로 아인 잘루트다. 이스라엘 북부인 이 지역에서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으면 좋겠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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