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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입만 살아있으면 작업"…뇌졸중에도 쓰러지지 않은 예술혼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27>백남준의 투병생활

'눈과 입만 살아있으면 작업'…뇌졸중에도 쓰러지지 않은 예술혼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휠체어 생활을 시작한 백남준(오른쪽)과 그의 기술조력자 이정성이 2003년 뉴욕 머서가의 백남준 자택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다. /사진제공=이정성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니 이제 천재의 창작활동은 ‘끝’인가 하는 걱정이 많았다. ‘반드시 다시 일어서리라’는 본인 의지가 강했다. 주변의 보필도 극진했다. 백남준의 기술조력자인 엔지니어 이정성은 백남준이 쓰러지던 1996년 4월에 마침 미국에 있었다. 매일 아침 뉴욕의 한인식당 강서면옥에 가 갓 지은 밥과 된장국을 사 날랐다. 전시조력자 박영덕은 백남준의 오랜 지병인 당뇨병과 아시아인에게 자주 발생하는 중풍에 좋은 약을 일본에서 구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가까스로 백남준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고, 뉴욕대 부속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퇴원해 러스크 재활의원으로 옮겼다.

매일 아침밥 사 나르고 중풍약 일본서 공수

극진 보필 속 입원한 지 한달만에 재활 시작

빨간 립스틱에 빨간 타이즈 입은 간호사로

‘性본능’ 이용하는 치료과정 비디오에 담아

아내 구보다 ‘섹슈얼 힐링’ 작품 만들어내

재활병원에서의 치료과정은 독특했고 이를 지켜본 아내 구보다 시게코의 시각도 비범했다. 구보다는 환자들에게 이성의 간호사를 붙여줘 리비도(Libido·성본능)를 이용한 재활치료를 실시하는 것을 보며 미국 가수 마빈 게이(1939~1984)의 노래 ‘섹슈얼 힐링(Sexual Healing)’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 ‘나의 사랑 백남준’에 따르면 “건강하고 젊은 두 여자 간호사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빨간 타이즈를 입은 대학을 갓 졸업한”이들이었고 “남준을 풍만한 가슴으로 누르며 갓난아기처럼 다뤘다”고 묘사했다. 질투 심한 구보다였지만 치료이니 별 수 없었다.

하루는 병원을 돌던 한 간호사가 백남준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백남준이 뉴욕 주립대 버팔로 캠퍼스에 출강할 때 강의를 들은 학생이라고 했다. 그가 시게코에게 “당신도 비디오 작가라고 들었는데 비디오 카메라는 어디 있나요? 뭐든 다 찍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 물었다. 순간, 구보다는 지루한 치료과정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게코는 이때부터 촬영한 비디오를 편집해 ‘섹슈얼 힐링’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2000년 3월 뉴욕의 랜스펑갤러리(Lance Fung Gallery)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백남준은 무력하고 퉁퉁 부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다며 그 작품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병원생활은 갑갑했다. 돌아다닐 수 없으니 먼산 보며 앉아있는 때도 많았다. 수시로 솟구치는 새로운 창작의 아이디어와 열정 때문에, 쉴 틈도 자식낳아 키울 시간도 부족했던 그였으니 답답할 만 했다. 백남준은 이제 제대로 조명받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병으로 쓰러진 것에 대해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푸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눈과 입만 살아있으면 작업'…뇌졸중에도 쓰러지지 않은 예술혼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미국 뉴욕의 머서가 110번지에 위치한 백남준의 자택 내부.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 종이에 크레파스로 그린 드로잉작업을 다수 제작했다. /사진제공=이정성

1995년 광주비엔날레를 준비하던 어느 날 전시팀장이던 정준모가 물었다.

“선생님은 작업 지시를 한 이후에 조수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바꾸더라도 ‘괜찮다’ ‘문제없다’ ‘좋다’ 하시잖아요. 그렇게 되면 선생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백남준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그게 나에게서 처음 시작된 아이디어니까 상관없어. 내가 나의 레시피로 만든 샌드위치에 다른 사람이 소스 조금 더 뿌리고 양파 조금 더 넣었다고 해서 그게 그 사람 것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 그래서 다른 작가들은 손을 못 쓰면 끝이지만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눈과 입만 살아있으면 작업할 수 있어.”

그 말처럼 백남준은 쓰러진 지 반 년쯤 지난 1996년 9월 무렵이 되자 조수들에게 꽤 긴 시간 작업지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기능을 되찾았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지만 약간의 거동도 가능해졌다. 불편한 몸으로 작업한 그의 말년 10년이 시작됐다.

백남준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호 분관에서의 전시를 위해 처음 대중 앞에 섰다. 일부러 지팡이를 짚고 몇 발짝 걷는 모습도 보여줬다. 그간 구상한 작업 계획도 천명했다.

“주 3회씩 물리치료를 받고 있으나 머리가 살아 있으니 다행입니다. 몇 년 전부터 내 관심은 비디오아트에서 레이저아트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내 작품에서 TV모니터가 없어지게 될 지도 몰라요.”

'눈과 입만 살아있으면 작업'…뇌졸중에도 쓰러지지 않은 예술혼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뉴욕 머서가 110번지의 백남준 자택 내부. 벽에는 백남준이 병석에서 그린 크레파스 드로잉이 걸려 있고, 아래쪽으로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이동을 돕기 위해 설치된 철제 구조물이 보인다. /사진제공=이정성

“레이저아트에 관심 내 작품서 TV 사라질수도”

투병 반년만에 ‘말’로 작업…새 구상 밝혔지만

“작품 빼돌린다”…‘人의 장막’ 친 구보다 영향

韓미술계와 소통창구 줄고 제작비 갈등 빚어

한때 간병인과 ‘하와이 도주계획’ 세우기도

작품 구상은 가능했으나 생활은 힘겨웠다. 혼자 다닐 수 없었기에 24시간 곁을 지키는 간병인이 필요했다. ‘스티븐’이라는 이름의 간병인은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부터 함께였다. 지병인 당뇨병 때문에 시작된 동거였고 나중에는 전신마비 환자의 간호를 도맡았다. 덩치 크고 다정한 스티븐이었지만, 외출이나 외식에서 돌아오는 길의 ‘운동시간’ 때만은 철저하게 냉정했다. 머서가의 아파트에 도착하기 한 블럭 전인 스프링가에서 휠체어를 멈췄다. 백남준을 휠체어에서 내리게 해 몸을 부축한 상태에서 자신의 다리 힘으로 걸어가게 했다. 환자는 힘들다, 못하겠다, 싫다고 매일같이 반항했다.

“남준, 나한테 화 내봐야 소용없어. 걸어야 해요. 오늘 이만큼 걷지 않으면 나는 해가 넘어가도 집에 안 들어갈테니까 맘대로 해요.”

강제로 시킨 그 운동 덕에 백남준은 다리의 혈액순환도 도울 수 있었고 어느 정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소중한 사람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그 가치가 두드러진다. 2001년 스페인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라는 회고전이 열렸다. 뇌졸중 이후 첫 장거리 해외여행을 앞두고서야 스티븐에게 여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불법 이민자였던 그의 부모가 아들의 시민권 문제를 매듭지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 수없이 새 간병인을 구해 스페인까지 동행했다. 수행 간호사는 반신불수 환자가 하루 몇 번, 몇 분 간격으로 용변을 보는지까지 생체리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신출내기 간병인은 스티븐과 달랐고, 백남준은 스페인에서 불편한 시간들을 보냈다. 최악의 상황은 뉴욕 JFK공항에 도착해 집으로 향하는 길에 터져버렸다. 잘 도착했느냐는 이정성의 전화에 백남준은 버럭 화를 냈다.

“내 인생 최악의 치욕을 당했어. 내가 JFK에서 들어오다 그만 차에서 실수를 했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누구를 더 탓하겠나. 백남준은 “내가 환자니까 할 수 없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눈과 입만 살아있으면 작업'…뇌졸중에도 쓰러지지 않은 예술혼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백남준(오른쪽부터)이 레이저 기술자인 노만 발라드, 엔지니어 이정성, 전시기획자인 갤러리현대의 도형태 대표에게 레이저를 이용한 신작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제공=이정성

한편 백남준이 쓰러지던 순간부터 외부에 대한 경계의 날을 세우기 시작한 시게코는 이 때를 전후해 인(人)의 장막을 치기 시작한다. 1997년 뮌스터 조각프로젝트 출품을 준비하고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 박영덕 박영덕화랑 대표나 2001년 올림픽공원에서 레이저 아트쇼를 기획한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 등과도 서서히 연락을 끊었다. 미술평론가 김홍희와 문화행정가 천호선 부부도 2000년 1월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을 마지막으로 백남준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실 백남준의 뉴욕 스튜디오는 ‘오픈하우스’나 마찬가지였다. 오래 교류한 이들 외에도 여러 한국사람들이 백남준을 찾아왔고 그때마다 집주인은 환대했다. 그런 한국 사람들을 시게코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시 백남준은 앉아서 종이 위에 끄적이듯 그리는 크레파스 그림을 상당수 제작했다. 시게코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몰래, 아픈 백남준의 작품을 빼돌리는 것 같다는 오해를 품은 모양이다. 백남준의 작품 판매대금은 공식적으로 시게코의 계좌로 입금되는데, 시게코가 신작을 위한 재투자 비용을 내놓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백남준이 아내 몰래 선급금을 끌어다 작품을 제작하곤 하던 것이 들통나 갈등을 빚기도 했다.

아픈 백남준은 고향이 그리웠다. 한국으로 가 침을 맞으면 낫지 않겠나 얘기를 꺼내봤지만 시게코가 펄펄 뛰니 엄두가 안 났다.

한 번은 엔지니어 이정성, 간병인 스티븐과 ‘하와이 도주계획’을 세웠다.

“시게코가 하와이를 좋아하니 우선 하와이 여행을 가자. 그런 다음 뉴욕으로 안가겠다고 버티면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시게코가 답답해하며 혼자 가버릴거야. 그러면 우리 셋이 한국으로 도망가자.”

악동같은 모의를 하며 킥킥거렸지만 시게코가 “노(No), 하와이”라고 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됐다. 전화통화는 정준모 정도가 유일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던 그는 한국의 미술계와 백남준을 이어주는 소통창구였다. 정준모는 “뉴욕으로 전화해 백남준 선생님 좀 바꿔달라고 하면 멀리서 말씀하는 소리가 버젓이 들리는데도 ‘잔다’ ‘없다’고 핑계를 대며 바꿔주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면서 “가까스로 통화가 되면 백 선생이 한국말로 ‘저 년이 전화를 도무지 바꿔주지 않는다’고 아내를 욕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눈과 입만 살아있으면 작업'…뇌졸중에도 쓰러지지 않은 예술혼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뇌졸중 이후 거동이 불편한 백남준이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2003년작 ‘쿠베르탱’의 중간 과정. 현재는 소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진제공=이정성

설상가상으로, 스티븐은 2003년 무렵 백남준의 집을 떠났다. 언제부터인가 마약에 손을 댔고 정신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시게코는 스티븐이 작품과 돈을 빼돌린 것 같다며 법정싸움까지 벌였다. 이즈음 송사가 겹쳤다. 백남준의 조수이던 디자이너 블레어 서먼, 전속화랑 칼 솔웨이 등과 대금지급 문제로 소송을 벌이게 됐다. 백남준의 형 백남일의 장남인 조카 켄 하쿠다가 백남준 부부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켄 하쿠다는 하버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터라 백남준의 법률 자문을 맡았다. 자연스럽게 삼촌 댁을 자주 드나들었고 백남준도 그를 신뢰해 훗날 저작권 상속까지 이어졌다. 다만 시게코가 갖고 있던 한국인과 한국 미술계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켄은 백남준이 의리와 정을 내세워 주먹구구식으로 작업하던 방식을 싫어했다. 백남준이 허락하고 제작을 지시한 작품까지도 ‘부정’하면서 한국과의 골이 깊어졌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이 ‘다다익선’의 복원계획을 수립하면서도 정작 저작권자인 켄 하쿠다와 논의하지 못한 것도 이때부터 시작된 해묵은 오해 때문이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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