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송 코스닥협회 회장
‘12나인(nine)’은 반도체 제조공정에 사용되는 액체 불화수소의 순도를 나타내는 용어다. 순도 9가 12개인 99.9999999999%라는 뜻으로 불순물 비중이 1조분의1밖에 되지 않을 정도의 초고순도 제품임을 나타낸다. 순도가 조금만 낮아도 반도체가 부식되기 때문에 액체 불화수소의 순도는 반도체 품질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로 액체 불화수소 생산 분야는 기술 장벽이 높아 그동안 모리타화학·스텔라케미파 등 일본 회사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2020년 새해를 맞아 한 기업으로부터 낭보가 들려왔다. 난공불락의 기술력으로 여겨졌던 ‘12나인’ 초고순도 불화수소의 국산화에 성공해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것이다. 바로 코스닥상장사 솔브레인이다. 일본 수출규제로 신음하던 우리 산업계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그리고 시장에서 코스닥 기업의 기술력과 잠재력이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코스닥 기업은 기본적으로 기술지향적이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이 생활 곳곳에서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가운데 다수의 코스닥 기업은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자율주행차·스마트팩토리 등과 관련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정부가 세계적 수준의 강소기업 육성을 목표로 선정한 ‘월드클래스300기업’ 중 절반 이상이 코스닥에 상장돼 있을 정도로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는 코스닥 기업들도 늘고 있다. 전체 코스닥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중 절반가량이 이공계 출신인 ‘테크노형 CEO’라는 점도 고무적이다. 이러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코스닥 기업은 국내 총수출액의 10% 규모인 연간 68조원이 넘는 금액을 해외에 수출해 우리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산업혁명에는 늦었지만 정보통신기술(ICT) 혁명에서는 선도적 국가”라는 말이 있다. 많은 국내 기업이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이제 추격자(fast follower)를 넘어 선도자(first mover)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기에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혁신과 창의를 바탕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미래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고 세계무대를 호령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솔브레인의 쾌거는 앞으로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단순히 개발기업 혼자만의 노력이 아닌, 납품을 받는 대기업 및 정부와의 유기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글로벌 경쟁과 불확실성 속에서 이러한 협력모델은 앞으로 그 진가를 발휘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 특히 자금과 조직이 넉넉하지 않은 중소규모 기업이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을 이루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 따라서 신속한 인허가, 연구개발 및 시설투자 세액공제, 스톡옵션제도 개선 등 정부 차원의 전향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코스닥에서 제2·제3의 ‘99.9999999999%의 기적’을 이룰 스타 기업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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