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KBS2 ‘아이리스’ 방영 당시 시청자들은 기존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었던 수준 높은 액션과 일본·유럽 등을 넘나드는 대규모 스케일에 열광했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 ‘홀리데이’ 등으로 유명한 양윤호 감독이 연출을 맡아 시작부터 화제가 됐던 드라마는 매 회마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한국 액션드라마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당시 시청률은 35%를 돌파했다.
그에 앞서 SBS에서 방영된 ‘연애시대’(2006)는 가슴을 파고드는 감성적인 대사와 장면들로 멜로 드라마의 새 장을 연 작품으로 기억된다.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인생드라마’로 꼽히는 이 작품은 영화 ‘고스트 맘마’ ‘찜’ ‘그녀를 믿지 마세요’ 등을 선보인 한지승 감독이 연출했다. 손예진, 감우성 두 배우의 감성연기 못지않게 영화감독 특유의 섬세하고 개성 있는 연출이 인기 비결 중 하나였다.
두 작품 이후로도 영화감독이 드라마로 ‘외유’하는 일은 이따금 이어졌지만, 최근에는 영화감독들의 드라마 진출이 부쩍 늘어났다.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를 꼽자면 영화는 감독 중심, 드라마는 작가 중심인 경우가 많으며, 방송으로 전국에 송출되는 드라마에 비해 영화는 표현의 한계나 제약이 적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드라마의 소재와 완성도, 표현 수위도 영화 못지않게 올라가는 등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점차 무너지는 추세다.
케이블 채널 OCN은 영화와 드라마의 포맷을 결합, 영화 제작진과 함께 웰메이드 장르물을 선보이는 ‘드라마틱 시네마(Dramatic Cinema)’ 프로젝트를 지난해 시작했다. ‘트랩’과 ‘타인은 지옥이다’에 이은 세 번째 ‘드라마틱 시네마’ 작품인 ‘번외수사’는 5월부터 방영될 예정이다. 차태현, 이선빈이 출연하며 영화 ‘내 안의 그놈’ ‘미쓰 와이프’의 강효진 감독이 연출을 맡고, ‘범죄도시’ ‘성난황소’를 기획·제작한 마동석의 팀고릴라가 공동기획해 안방에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줄 예정이다. ‘드라마틱 시네마’를 처음 기획한 한지형 책임프로듀서(CP)는 지난해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더 이상 ‘영화 같은’이라는 표현과 경계가 무의미해진 시대에 ‘영화·드라마라는 규정이 필요할까, 적극적으로 그 경계를 허문다면 어떨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했다”고 기획 배경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캐릭터·서사·소재 그리고 작품을 만들어낼 크리에이터에 대한 선택의 폭과 시야도 더 넓어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점점 무너지면서 창작자의 다양한 작품 세계가 안방극장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 시즌2와 tvN ‘방법’이 대표적이다. ‘킹덤2’의 1회는 시즌1에 이어 영화 ‘끝까지 간다’ ‘터널’의 김성훈 감독이, 2~6회는 영화 ‘모비딕’ ‘특별시민’ 박인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방법’은 연상호 감독 극본에 김용완(영화 ‘챔피언’) 감독이 연출했다. 각각 조선시대 좀비와 주술·토착신앙이라는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소재였지만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킹덤’은 공개되자마자 시즌1에 이어 전 세계적으로 호평받았고, ‘방법’도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성과 흥행에서 모두 만족스러운 성적을 냈다. ‘미드는 본업에 충실히 진행하고, 일드는 교훈을 남기며, 한국 드라마는 연애만 하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무색하게 한국 드라마도 영화 못지않은 다양한 소재와 장르, 형식으로 기존의 틀을 깨뜨리고 있다.
이처럼 ‘영화 같은 드라마’가 속속 등장하는 배경이 된 것은 플랫폼의 변화와 제작 환경 변화다. 지상파 3사만이 주도하던 드라마 시장은 2010년대 이후 종편과 케이블이 뛰어들면서 ‘판’이 바뀌었다. 최근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까지 등장하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고, 제작 편수가 늘어나자 소재 다양화 차원에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이야깃거리가 드라마로 들어오게 됐다. 시청자들의 눈높이도 그만큼 올라갔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플랫폼이 등장했고, 하나의 플랫폼에서 장르별 콘텐츠를 모두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드라마에서도 다양한 실험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쪽대본 촬영이나 밤샘 촬영에서 벗어나는 등 제작 환경이 개선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됐다. 영화인들도 드라마에서 적당한 혹은 넉넉한 예산으로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찍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30년 가까이 드라마 업계에 몸담고 있는 한 연출자는 “예전에는 더 잘 찍고 싶어도 당장 내일 모레 방송이 나가야 했던 만큼 공장에서 찍어내듯 장면을 찍어내는 경우가 있었다”며 “이제는 ‘쪽대본’으로 촬영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신경 써서 찍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드라마에 뛰어드는 영화사들도 눈에 띈다. 콘텐츠 장르 간 경계가 이미 허물어진 상황에서 영화만 고집해서는 오히려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영화업계에서 쌓은 노하우를 드라마 제작에 도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영화 투자배급사인 뉴(NEW)는 KBS2 ‘태양의 후예’(2016)를 성공시킨 후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앤뉴를 설립하며 JTBC ‘보좌관’ 등을 제작했다. 쇼박스도 첫 드라마로 JTBC ‘이태원 클라쓰’를 선보였으며, 롯데컬처웍스도 지난해 TV조선 ‘조선생존기’로 TV 드라마 사업에 진출했다.
공 평론가는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각각의 단점이 보완된 또다른 형식의 콘텐츠가 나오거나, 원소스멀티유즈 (OSMU)가 더 확장될 수 있다”며 “한 작품을 영화·드라마로 동시에 기획해 각각의 스타일로 만드는 것이 한 예”라고 설명했다.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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