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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 받든 조선의 외교관...목숨 걸고 낯선 세상을 만나다

[책꽂이]■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손성욱 지음, 푸른역사 펴냄

수백 권 넘는 연행록 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사건 추려 정리

코끼리·사진기 보며 놀라고

임무 수행 실패하면 귀양길도

19세기말 외교관계도 보여줘

청나라 조공국 사신과 외국 사절이 입조한 장면을 묘사한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사진출처=베이징고궁박물원




사행(使行). 조선 왕의 사신으로서 북경을 다녀오는 일은 아무리 짧아도 3개월은 족히 걸렸다.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도달하는 데만 한 달이다. 날씨 좋은 봄 가을 중 택일해 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정월 초하루 북경에서 열리는 조회 참석이 목적인 정기 사행은 살을 후비는 추위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고단한 여정 탓에 목적지 도착 전에 황천길로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17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 관계가 그러했다. 삼전도의 굴욕을 생각하면 여전히 치가 떨렸지만 이미 역사는 격변해 있었다. 험난한 여정 끝에 북경에 당도한 조선 사신단의 눈에 비친 풍경은 어떠했을까. 책으로만 접했던 청나라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한중관계 전문가인 손성욱이 쓴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는 개인이자 공인인 조선 사신이 이국에서 보고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수백 권 분량의 연행록(燕行錄)에서 눈여겨 볼 만한 사건들을 추려 내어 정리한 책이다. 청나라에 다녀 온 기록을 묶은 연행록은 19세기에 쓰인 것만 100종이 넘는다. 김창업의 ‘논가재연행일기’, 홍대용의 ‘담헌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3대 연행록으로 꼽히지만 다른 연행록에도 깊이 들여다보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꽤 실려 있다.

러시아 사진사가 1860년대에 촬영한 조선 사신단의 모습. /사진출처=Council for World Mission, SOAS


책은 유람, 교유, 교섭, 사행 이후 등으로 나눈 4부 구성이다. 먼저 유람과 관련해서는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온 사신들이 글로만 접했던 진귀한 세상 문물을 직접 보고 들으며 놀라워 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들은 베트남 등에서 조공 받은 코끼리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의례를 지켜본 후 동아시아 질서가 변했음을 느낀다. 후일 청나라가 쇠하자 코끼리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춘다.

청나라에 간 사신은 조선 최초의 사진 속 인물이 되기도 했다. 이항억의 ‘연행일기’에는 사진기에 대한 묘사와 유리판에 금방 그려진 초상화를 보며 굉장히 놀라워 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는 현재 영국 소아즈(SOAS)가 소장한 사진으로 증명된다. 영국인 선교사 윌리엄 로크하트가 북경에서 수집해 기증한 사진의 촬영자는 러시아 사진사, 사진 속 인물은 조선 사신단이다.



이항억은 대중목욕탕에 들른 경험도 기록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 양반으로서는 기록이 꺼려졌을 법하지만, 그는 목욕탕의 시설과 운영 방식이 신기했다고 전한다.

낯선 문물을 접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본연의 임무는 한없이 무거웠다. 조선 왕실에서 원한 바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에는 한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곧바로 귀양길에 올라야 했다. 이 때문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신이 되길 고사하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에 조선 사신은 북경 인맥 만들기에 주력했고, 필요한 경우에는 황제에 가까운 이들에게 줄을 대기 위한 뇌물도 썼다. 숙종 당시 세자 책봉 문제로 북경에 간 사신단은 임무 수행에 실패할 위기에 처하자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도 했다. 숙소 앞에 돗자리를 깔고 곡을 했는데, 저자는 “만주족을 오랑캐라 경멸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 사대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만큼 사정이 급박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책의 후반부는 제국주의 열강의 득세로 기존 질서가 흔들리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의 청나라와 조선의 외교를 다룬다. 밀려드는 외세에 조청 관계도 휘청이고, 청나라 역시 자국의 안위를 지키느라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 신경 쓸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북경이 아닌 천진에 공관을 두고 우회 외교를 시도했다. 북경 공관은 청나라가 청일 전쟁에 패한 후에야 설치됐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은 큰돈을 들여 전 미국 주청공사 찰스 덴비의 건물을 사들였지만, 미국 측은 본국과의 소통 문제 등을 이유로 건물을 비워주지 않았다. 1901년 건물을 매입했지만 1903년 4월에서야 대한제국 주청공사가 입주할 수 있었던 사건은 구한말 쇠락해가던 한반도의 운명을 보여준다.

저자가 널리 알려진 연행록만 소개하지 않고 다양한 조선 사신의 이야기를 전한 것은 평범해 보이는 사건 안에도 재미와 시사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낯선 땅에서 느꼈을 선조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외교 관계를 고민해보자는 뜻도 담겨 있다. 1만5,9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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