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커튼을 걷고 전시회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아치형 입구를 지나 독특한 조형물과 조우하는 것을 시작으로 관객들은 하나의 거대한 ‘던전’(Dungeon) 같은 공간을 헤매게 된다. 여러 갈래로 갈림길이 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작품 명과 작가 이름도 없다. 시각·청각·후각·촉각·공간지각 등으로 보고 느끼며 담아가는 ‘개별적 경험’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라는 취지다. 독특한 경험을 안겨주는 이 전시는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실감 몰입형 전시 ‘비욘 더 로드’(Beyond the Road)다.
전시는 영국 전자음악 뮤지션 제임스 라벨의 앨범 ‘더 로드’(The Road) 파트 1·2를 미디어아트·설치미술·회화로 변주하고 재구성했다. 지난 2019년 영국 런던의 사치 갤러리에서 처음 열린 이 전시가 영국 외 지역에서 선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기획자인 스티븐 도비와 콜린 나이팅게일은 “음악을 분해해서 입체적으로 재설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라며 “아티스트가 구현하려던 세계가 무엇인지, 앨범의 세계로 관객이 직접 들어가 경험할 시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약 1,000㎡ 규모의 전시장의 총 33개 공간마다 특색 있는 작품들이 관람객들을 기다린다. 버스 정류장과 공중전화 박스에 그려진 강렬한 색채의 그래피티가 눈길을 끌기도 하고, 교회당 모양의 작은 공간에서는 물결 미디어아트가 쉴 새 없이 재생된다. ‘향기의 방’에서는 향수 디자이너 아지 글래서가 향수 100개를 조합해 만든 향이 코를 찌르고, ‘촛농의 방’에서는 촛농으로 뒤덮인 탁자를 직접 만져볼 수 있다. 한국 민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까치와 호랑이를 이용해 제작한 작품은 한국 전시를 위해 추가됐다. 알폰소 쿠아론, 대니 보일 등 유명 영화감독들의 참여도 눈에 띈다.
곳곳에 설치된 100개의 스피커에서는 작품의 모티브가 된 총 11곡의 앨범 수록곡이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음악과 어우러져 시시각각 변하는 영상과 조명 하나하나가 모두 작품이며, 관람객이 머문 공간과 시간에 따라 경험하는 것도 천차만별이다. 11월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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