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오랜 침묵을 깨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에 엮이며 지난 2017년 이후 공격적인 투자 집행을 미뤄왔던 삼성전자는 170억 달러 (약 20조 원) 규모의 미국 신공장 투자에 대한 확정 발표를 시작으로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돼 있는 포트폴리오를 가다듬고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는 차량용 반도체 등 미래 기술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M&A)도 조만간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1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빠르면 이달 말 이 부회장은 미국 출장길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프로포폴 관련 선고 공판이 있는 오는 26일 이후가 유력하다. 늦어도 다음 달에는 미국 방문이 확실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이 까다롭고 복잡한 심사를 감수하고도 미국을 향하는 것은 최종 결정만을 남겨둔 미국 제2 신공장 투자 계획 발표 때문이다.
미국 신공장 확정·파운드리 경쟁력 극대화
당초 삼성전자는 늦어도 4분기에는 신공장 부지 선정을 마무리 짓고 착공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현재 가장 유력한 공장 후보지로 알려진 텍사스주 윌리엄슨 카운티 테일러 시의회는 지난 14일(현지 시간) 세금 감면과 개발 계획, 세금 증가분의 재투자 구역 지정 등 삼성전자 진출을 지원하는 이른바 ‘삼성지원법’을 최종 의결하며 행정절차를 마무리했다. 이는 9월 9일 현지에서 개최된 공청회를 통해 한 달가량 수집한 주민 의견을 토대로 한 테일러시 차원의 ‘최종 혜택꾸러미’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아직 어떤 지역이 공장이 지어질 곳인지 확정되지 않았다”면서도 “테일러시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제안한 세제 혜택을 꼼꼼히 검토하고 텍사스주 오스틴과 뉴욕·애리조나주 등 후보지 4곳 가운데 가장 유리한 곳을 정하려 한다”고 말했다.
만약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삼성전자의 제2 반도체 공장이 세워진다면 이곳은 3나노미터(㎚·10억 분의 1m) 또는 5나노의 초미세공정을 기반으로 하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라인을 포함할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1996년 미국 오스틴에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세우며 대미 투자의 물꼬를 튼 삼성전자로서는 25년 만에 추진하는 대규모 투자이자, 복귀한 이 부회장이 ‘1위’를 향한 집념을 뚜렷이 밝혔던 시스템 반도체 투자라는 점에서 이번 투자를 ‘뉴삼성’의 주춧돌로 여기고 있다.
“연평균 24% 성장률”…테슬라 등 빅테크 수주 겨냥
파운드리를 향한 삼성전자의 굳은 결의는 해당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 고위 임원들의 언급으로도 뒷받침된다. 6일부터 8일까지 온라인으로 열린 ‘삼성전자 파운드리 포럼 2021’에서 삼성전자의 한 고위 임원은 “올해 기준 100여 곳인 고객사를 2025년까지 300곳으로 늘리겠다”며 파운드리 사업의 연평균 성장률을 24%로 제시했다. 이 예측은 테슬라나 구글·아마존 등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자율주행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빅테크 기업들이 고사양 반도체를 만들어 줄 파트너사로서 삼성전자를 낙점할 가능성이 높다는 업계의 분석과도 궤를 같이한다. 실제로 최근 삼성전자는 테슬라의 2세대 자율주행칩 HW4.0을 생산하는 수주를 따냈으며, 내년 2분기 양산하는 테슬라 전기차의 자율주행 데이터 처리를 담당할 핵심 반도체를 이르면 올 4분기부터 생산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우선 미국 제2 신공장 현안을 마무리 지은 뒤 보유한 현금성 자산 130조 원을 활용해 대규모 M&A도 추진한다. 차량용 반도체가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2016년 하만 인수 이후 처음으로 추진하는 이 M&A는 AI와 5세대 이동통신(5G), 자동차 부품 등 그룹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가 확실하면서도 반도체, 그중에서도 파운드리와 융복합이 가능한 기술을 지닌 회사를 타깃으로 할 것으로 분석된다. 앞서 2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서병훈 삼성전자 IR담당 부사장은 “3년 안에 의미 있는 규모 M&A 실현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현재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대규모 M&A도 진행
메모리 반도체의 절대 강자인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 이토록 총력전을 펼치는 것은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 전천후 대응 가능한 유일무이한 기업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안정적으로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지만 불꽃처럼 영역을 확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성숙한 시장이라는 점도 ‘파운드리 진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코로나19 이후 급격하게 상승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하락 반전할 것이라는 전망에 뒤덮일 정도로 상대적으로 공급 과잉에 대한 우려가 높은 분야라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여전히 서버·스마트폰·PC 등에서 발생하는 D램 수요는 여전하기에 D램 가격이 급격하게 하락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도 “다만 암호화폐 채굴 등 통계를 벗어난 수요가 출렁대는 상황이 일시적으로 D램이나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영향을 줄 수는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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