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시장이 대내외 악재로 조정 국면에 들어서자 기업들이 전환사채(CB)의 전환가액을 조정(리픽싱)하는 사례가 늘어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잦은 리픽싱이 기존 주주들의 지분이 희석되는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2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상장사들이 전환가액의 조정을 공시한 건 수는 이달 들어서만 103건에 이른다. 지난 9월에는 118건, 8월 95건을 기록했다. 지난해 10월 52건, 9월 50건, 8월 80건보다 크게 증가한 수치다.
CB는 채권인데,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얹어 준 상품이다. 투자자는 발행한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채권에 투자한 원리금과 약속된 이자를 챙길 수 있고, 회사 주가가 오르면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해 시세 차익을 볼 수도 있다. CB 발행사는 낮은 이자율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성장성이 높으나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이 주요한 자금 조달 수단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최근 국내 증시가 인플레이션 공포로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면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전환가액을 하향 조정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면서 전환 가능 주식 수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전환 주식의 물량이 늘어나는 만큼 기존 주주의 주식 가치 희석 비율은 더욱 커지게 된다.
올해 들어 CB 전환가액을 연이어 하향 조정했던 코스닥 상장사 엔에스엔(031860)은 전환 가능 주식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오버행(잠재적 대량 매도물량)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환가액 조정으로 23~25회차 CB 전환 가능 주식 수는 1,764만 주로 이는 현재 엔에스엔 발행주식 총수(5,769만여 주)의 30.6%에 달한다. 전환가액 추가 하향 조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데다 다른 회차 잔여 CB 물량도 남아 있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이오플로우(294090)가 있다. 이오플로우는 이날 시가 하락에 따라 1회차 CB의 전환가액을 기존 6만 1,348원에서 5만 8,100원으로 내려 잡았다. 이로 인해 조정 전 전환 가능 주식 수는 57만 515주에서 60만 2,409주로 5.3% 늘었다. 또 더이앤엠(THE E&M(089230))은 19일 시가 하락에 따라 15회차 CB의 전환가액을 기존 952원에서 829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전환 가능 주식 수는 525만 2,100주에서 603만 1,362주로 14.83% 늘었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리픽싱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리픽싱 횟수, 기간 및 한도 등에 대한 제한 규정을 도입해 과도한 리픽싱으로 인한 기존 주주 가치의 희석 문제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며 “다만 단기간에 리픽싱 금지 제도를 도입하는 경우 CB 상품성이 크게 낮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점진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신용등급 요건을 제한하거나 공시제도를 강화해 정보 제공을 늘리는 등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 연구위원은 “국내 CB의 경우 대부분 신용등급을 받지 않고, 투자자의 신용 분석 능력과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며 “투자자들이 기업의 성장 가능성과 신용도를 판단해 합리적으로 투자하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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