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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칼럼]고통받는 자에게 주는 말

데이비드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우린 허약하고 인생은 예측 불가능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고통속에도

삶의 이유 찾고 용기·이해심 유지땐

매일 조그마한 승리 거둘수 있을 것





몇 주 전 강연을 마친 뒤 참석자들로부터 서면 질문을 받았다. 대부분 정치와 사회에 관한 것이었지만 색다른 내용이 하나 있었다. ‘평생 죽지 못해 살아온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이냐’는 다소 엉뚱한 물음이었다.

필자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자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 질문은 필자의 머리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도 그분에게 명쾌한 대답을 줄 수는 없지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반응하기로 했다. 먼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서 출발하자. “질문을 주신 분에 대해 제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당신이 평생 형용하기 힘든 숱한 고초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버티고 계시니 대단한 인내력의 소유자이시네요. 제게 조언을 구하시는 것으로 봐서 지금도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계시는 것 같은데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내가 아는 다른 한 가지 사실은 이것이 그 사람 혼자만 겪는 고통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은 늘 고통받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절망의 만조를 경험했다. 슬픔, 부끄러움, 퇴출, 실연, 물리적 혹은 정신적 건강 문제 등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고통의 공통분모는 타인과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소외감이다.

물론 내게도 힘겨운 계절이 있었다. 나는 그때 감정적 고통이 가슴과 복부에 날카로운 물리적 통증을 일으킨다는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타인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자기 소외의 유혹을 일으킨다. 어느 때보다 타인과의 접촉이 필요한 시기인데도 말이다. 견디기 힘든 극단적 고통이 닥칠 때마다 나는 나보다 훨씬 큰 어려움에 처했던 분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한 명이 나치 독일 시절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토르 프랑키다.

프랑키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자체를 컨트롤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조절이 가능하다. 끈기와 용기, 이타심과 품격을 유지한 채 어려운 상황에 대응하면 인생에 깊은 의미가 더해진다. 제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우리는 매일 조그마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나치 수용소에는 고통스럽게 살기보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프랑키는 그들에게 “아직도 당신의 인생은 당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키는 그들에게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쉽게 풀어 들려줬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삶의 무게를 견뎌낼 방법을 찾아낸다”고 말이다.

성서는 요나·엘리야·모세 등 삶의 무게에 압도돼 죽음을 원했던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이 느꼈던 처절한 막막함과 황량함이 인생 경험의 불가결한 부분이기에 성서의 한복판에 그들을 세워놓은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렇듯 고통은 성서의 인물들에게 심오하면서도 불가측한 영향을 줬다. 고통은 사람들을 이기적이고 사랑과 유머를 모르는 성난 자들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람을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닫힌 마음을 깨뜨려 열어젖힌 고통의 숱한 사례를 안다. 이런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지게 된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지혜에 이른다는 옛말은 결코 틀린 게 아니다. 우리는 종종 행복한 시기보다 어려운 시절을 거치며 많은 것을 배운다.

그렇다고 고난을 겪은 사람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은 무력할 뿐이다. 그러나 인생의 황량함을 맛본 사람들은 타인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랍비인 엘리엇 쿠크라는 뇌 수술을 받은 후 툭하면 쓰러지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 여성이 쓰러질 때마다 사람들은 다퉈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그는 쿠크라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서둘러 저를 일으키는 것은 성인이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기가 거북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제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니라 그저 제 곁에 함께 누워주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에게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향해 무슨 말을 해주는지 물었다. “당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는 그 목사님의 대답을 제게 질문하신 분에게 그대로 들려드리고 싶다. 이 세상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리라는 환상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선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허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고 인생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시인이기도 하다. 삶은 변한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 낙심의 늪은 기쁨의 땅에 길을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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