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모든 게 밥그릇으로 통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시선이 비딱해서인지 누군가 “내가 돈, 자리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나 싶어 오히려 의심부터 간다. 이기적인 욕심을 그럴듯한 이유로 포장할 때가 많은 것은 기자 역시 마찬가지라서 더더욱 그렇다.
최근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홍준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가 보수 정치인이 된 것은 우연이자 운명의 장난이라고 했다. 1996년 꼬마 민주당이 먼저 접촉했고 홍 후보도 가고 싶어했는데 내부 사정으로 지체되는 사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화를 먼저 받고 약속을 하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보수의 전사가 됐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진보 DNA나 보수 DNA는 타고 태어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확대해석하면 거창한 신념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가 지금의 ‘홍준표’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요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줄을 댄 일부 친문 정치인들이 문재인 정부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생존만큼 가장 강력한 욕망이 어디 있나 싶다.
내년 3월 대선을 두고 세대 간 선택이 엇갈리는 것도 경제적 요인이 크다고 본다. 여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인 40대는 현 정부 들어 집값 폭등에 따른 자산 가격 증가, 친노동 정책의 수혜를 입었다. 그 정책의 역효과는 아직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20대, 집을 사지 못한 30대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이처럼 사회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신념에 영향을 미치지만 거꾸로 공정, 개혁, 불평등 해소, 애국심과 같은 대의명분 자체가 밥그릇의 원천이 되는 장면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인간 본성이 이런데도 자신의 물적·집단적 기반에서 한발 물러나 사회를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양심에 어긋날 때 자기희생까지 각오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또한 타인의 가치에 대한 관용이 없는 사회에 어떤 미래가 있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대량 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뒤 미국 정부의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저지하려다 반역자로 몰려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됐다. 그는 나중에 복권됐지만 미국 과학계는 한창 일할 나이의 천재 과학자를 잃고 말았다. 또 다른 매카시즘의 희생자였던 중국계 과학자 첸쉐썬은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 핵 개발을 주도했다.
아무리 전체주의 사회라도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 ‘진리(Veritas)’는 ‘나의 빛(lux mea)’일 뿐 ‘우리의 빛’이 아니며 ‘너의 빛’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문 정부의 적폐 청산과 과거사 논쟁 등을 거치면서 두 조각 나고 말았다. 양극단 세력은 ‘내 멋대로 정의’나 ‘나만의 공통선’을 내세우며 곳곳에서 상대방의 흠결을 찾아 단죄하기에 바쁘다. 이 때문에 내년 대선은 더 혐오스런 후보를 떨어뜨리고 상대방 진영을 묵사발 낼 수 있는 기회로 전락했다.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의 도덕적 담론이 힘을 얻으면서 우리 경제의 역동성이 후퇴하고 있다는 점이다. 땀을 흘려 이룬 결과 대신 과정만 꼬투리 잡을 때 기업가적 혁신, 일자리가 살아날 리 없다. 사이비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사회적 타협이 가능한 사안에도 굳이 상대 진영을 공격해 돈과 권력을 만드는 동안 그 피해는 대다수 구성원에게 돌아가고 있다.
내년은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다. 우리 민간설화에서 호랑이는 잡귀를 물리치는 영물이자 재난을 몰고오는 맹수이기도 하다. 또 때로는 의리 있고 지혜롭게, 때로는 어리석은 동물로도 묘사된다. 이 모두가 문화적 자산이다. 산업화나 민주화 세력은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야 할 공존의 대상이지 서로 적이 아니다. 사회적 가치란 다양한 욕망의 발현이나 집합체이며 과거 상대방의 빛은 물론 그림자조차 끌어안을 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쯤 받아들일 수 있을까. /choih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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